기존성의 상투를 자른 단발령의 피흘림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오늘은 머리를 염색하고 있다. 무더위를 견딘 나의 머리결은 상당히 길거나, 세월의 세치가 점점점 많아졌다. 희긋한 머리는 중년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타당하여도, 인생은 보다 쾌활하고 명랑하게 보이는 것이 살아가는 이치이니, 새로움의 변화는 신호등처럼 필요하다. 그렇다. 오늘은 염색변화다.
머리손질하러 왔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내가 지쳐 보이니, 경제적 부담이 없지는 않아도 나를 위한 투자를 결정했다. 헤어 디자이너는 언제 보아도 그 손길에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한올한올에 초콜릿 빛깔 염색약을 바르며, 색칠하듯 꼼꼼히 모든 두피를 만지는 기술은 예술적 숭고함이 엿보인다.
머리를 자를 때마다 나는 단발령의 역사적 사건이 생각난다.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병헌 주연)을 통해서도 자세히 표현되는 조선말의 격동기는 지금을 재조명한다. 역사는 항상 현실을 보여준다. 단발령은 오랜 관습의 뿌리를 잘라내는 일이다. 현대인이 미용실에서 머리손질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이지만, 조선말 상투에 칼을 대는 것은 조상의 근본이 뿌리채 뽑히는 격변이었다.
‘머리를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는 그 신념을 과연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각자 숭고한 가치로 마음깊이 품은 사상이 송두리채 흔들린다면, 오랜 꿈이 물거품이 된다면, 국민을 배반한 과거 권력의 침탈처럼 그러한 붕괴가 있음이다. 산사태처럼 충격이 일상에 일어남이다.
천주교가 성경의 진리를 지키려고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매도하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대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투는 모든 기존성의 상징이다. 아마도 단군왕검때부터 지켜온 거룩한 전통의 뿌리가 상투였으리라. 동이족을 특징하는 머리의 뿔로서 솟음의 자부심!! 그 상투속에 각종 벌레가 썩고있음은 자명한 일인데…. 그 누구도 감히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으니 전통은 왕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이다.
과연 변화와 개혁을 행한다면 단발령의 정신으로 해야한다. 단단히 각오하고 상투를 자르듯 결정해야한다. 이발이나 머리손질의 마음으로 해서는 단발령의 개혁이 실현될 수가 없다. 단발령은 곧 개혁의 문을 여는 것이다. 마치 종문서를 불태우듯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여는 것이다.
모세가 정한 율법은 오랜 관습의 상투였다. 그 누가 감히 율법에 손을 댈 수 있으리요. 모세의 율법은 상투처럼 모든 구약인의 사상을 지배했다. 과연 상투는 갓의 받침대였으니, 하나님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였다. 상투를 자르는 일은 갓을 없애는 것처럼 신을 향한 도전이요, 기존성을 향한 모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폐단”을 단발령으로 없앴고, 율법을 완전히 새롭게 했다. 상투를 잘라내듯이, 율법의 제사의식을 없애고, 사람이 직접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새로운 종교제도를 만들었다. 율법주의자들은 모세를 내세우면서 ‘양과 염소의 정결함’을 강조했으나,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사람의 정결함’을 강조했다. 완전히 다른 종교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서 십자가에 메달려 인류의 대제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율법의 제사는 사라졌고, 제사의식의 상투 대신에 십자가의 복음이 인류 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모세가 아무리 대단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통해 모세의 율법은 기존성의 상투가 될 뿐이다.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도 2천년 동안 인류문명의 중심이 되어서 ‘하나님’을 받치는 든든한 상투가 되었으니, 十위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였다. 밤에 서울을 내려다보면 十로 가득하다. 하늘에는 별들이, 땅에는 十이다. 十은 곧 죽음의 상징물인데, 그 누가 감히 十의 본질에 물음을 제기할까?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오면 과거는 기존성의 상투가 될 뿐이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서 죽게 함으로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구원의 이론이 기독교의 근간이다. 과연, 부모가 자식을 죽이려고 낳았다는 이론, 또는 부모님의 사망 보험금으로 자식이 가난을 모면했으니,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잘 당했다는 그런 구원의 이론이 상식적인가? 그리하여, 기독교는 예수님을 항상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자신들은 죄의 옷을 벗고 세상을 편안히 살아간다. 자신들의 새끼 손가락에는 바늘이 찔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날마다 예수님을 죄의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몰라서, 무지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유대인이 몰라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죽지 않고서 예수님이 장수했으면 인류문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영광의 주님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셨는데, 유대인이 몰라서 죽인 것이다” (정명석 목사님의 성경해석)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這智慧世上有權有位的人沒有一個知道的.他們若知道、就不把榮耀的主釘在十字架上了.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보완되어서 완성되었다. 율법이 상투로 잘린다고 하여서 머리가 잘리는 것은 아니다. 상투만 잘리는 것이다. 그와 같이 십자가의 복음도 정명석 목사님의 희생적 진리로 보완됨으로 완성되었다. 그 누가 감히 십자가에 손을 댈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물인데, 왕의 용안을 감히 쳐다볼 수 없듯이 인류문명은 십자가 밑에 예속되었다. 마치 유대인 모두가 율법아래 예속되듯이 그러했다.
단발령은 곧 기존성을 완전히 절단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것이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목을 자르는 것보다 더 큰 비난과 수모와 고통이 따른다. 개혁(改革)은 가죽을 벗기는 한자해석처럼, 처절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새로움의 문을 여는 것은 순교의 피흘림으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상투를 단발령하면서 피흘림을 당하였듯이, 이 시대도 그가 십자가의 상투를 단발령함으로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기 위해서 갇힘의 피흘림을 받았다. 하늘이 보낸 사명자들은 희생의 고난을 거친 후 영광의 면류관으로 출현하였으니, 이제는 상투없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열림이다.
거울앞에 비친 내 모습은 염색으로 새롭게 달라졌다. 물론, 상투는 없다. 또한 십자가의 상투도 없다. 내게 있는 십자가는 오직 사랑의 십자가요, 책임의 십자가이다. 내가 배운 성경의 진리가 이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곧 신이라,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곧 하나님과 함께 함이니, 말씀을 삶속에서 살아감이 이 시대 신앙이다”
그리하여, ‘죽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다’는 ‘무지의 십자가’를 상투처럼 잘라버린 정명석 목사님의 담대한 진리에 나도 함께 한다. 오직 진리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로서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진실한 뜻임을 확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