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거(證據)는 근거(根據)를 들어서 증명(證明)하는 것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모든 역사는 ‘그리스도’로 통한다. 구약과 신약이 그러했고, 이 시대도 그러하다. 사도바울의 논증을 보면, ‘그리스도=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놓고서, 구약의 모든 것을 풀어낸다. 구약의 모든 것을 풀어내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확인한 것이 아니다. 이미 답을 알고서, 그 답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것을 활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어떻게 알았을까?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배에서 설교할 때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임을 깨달았고, 이후 3년을 따라다니면서 삶속에서 겪어서 알았다.
답을 알았으나,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면, 엘리야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아무런 답을 못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왜 유대인은 엘리야가 누군지 묻나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성경의 기본지식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정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제대로 모르면 결정적일 때 혼돈이 발생한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문제와 답으로 확실히 아는 것이다. 답은 늘상 문제를 통해서 그 가치가 증명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각종 지식으로 시대 사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논증은 참 미련하고, 무식하다. 시대 사명자는 이미 정답인데, 정답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구약의 초등학문으로 성약의 정답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사명자에 대한 확신은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가능한 것이지, 어떤 이론의 학습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론의 학습은 단지 몽학선생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디딤돌에 불과할 몽학선생으로서 성경지식이지만, 전도와 증거에는 매우 중요한 기초지식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중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머리의 두뇌는 태만과 권태와 안락과 휴식을 요청하지만, 나는 오늘도 지식의 연필끝을 깍는다. 드라마를 보든,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든, 시대의 정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사명자의 만능키가 모든 사건에 적용됨을 확신함으로 모든 이치를 논증한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세상의 역사든, 현대사든, 민족의 예언이든, 인류문명이 걸어온 모든 역사의 운명이든, 그 정답은 시대 그리스도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는 ‘진리의 길’이고, 모든 역사는 결국 하나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냇물이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강물을 반드시 거쳐야한다. 시냇물은 모든 문제요, 강물은 시대 사명자의 진리요, 바다는 하나님이다.
내가 쓴 모든 칼럼은 단순하다. 정답을 향한 논증일 뿐이다. 구약의 정답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약의 정답은 성약의 주인공이다. 정답을 깨달은 자로서,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요엘서를 토대로 성경적 논증을 펼치듯, 스데반이 구약성경의 모든 이치를 열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입증하듯, 사도 바울이 구약의 모든 이치를 재해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임을 논증하듯, 이 시대도 그러해야할 것이다. 증거(證據)는 곧 근거를 들어서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정답을 설명하는데, 풀이과정이 곧 증거다.
증거를 잘하는 것은 반드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에 대해 정답이 무엇인지 상대가 납득하도록 설명해야한다. 정답은 이미 정해졌으니, 필요한 것은 문제파악이다. 문제는 사람마다, 사건마다 모두 다르고, 시대 사명자의 진리는 만능키로서 열쇠가 되니, 문제를 파악해서 근거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은 각자의 지식과 지혜로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문제를 파악하려고 지식의 연마에 더욱 몰입한다.
각자가 안하면 누가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