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자들만 배울 수 있는 새노래
1990년대에는 누구나 쉽게 새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배우지 않아도 부를 수 있었다. 과연 그러했다. 유행가 리듬에 가사만 달랐다. 곡(曲)은 세상에서 빌려와 가사의 옷을 입혔다. 이러한 방법은 개사곡(改詞曲)이다. 가사를 바꾼 곡이다. 루터가 개사곡의 방법으로 찬송가를 보급했다. 당시 독일민요와 독일유행가가 지금의 찬송가 곡이다.
지난 2월 그가 자유를 얻고, 찬양곡도 자유로워졌다. 말씀의 가사가 세상의 곡에 속했으나, 새로운 곡을 작곡함으로 완벽한 새노래가 탄생했다. 또한, 요즘 새노래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록 14장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예언의 성취가 폭포수처럼 이뤄지니 기쁨이 충만하다.
[계시록 14장 1~5]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시록 14장 3절에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라고 되어있다.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새노래에 대해 “구원받은 자들만 배울 수 있는 곡(曲)”으로 정의하고 있다. 새노래를 배움에 있어서 구원을 받은 자 외에는 배울 수가 없다고 했다. 개사곡은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그를 통해 작곡, 작사한 지금의 창작곡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음으로, 과연 그를 믿고 따르는 자외에는 배울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으니, 사도 요한을 통해 예언한 새노래의 비밀이 얼마나 오묘한지, 그가 자유를 얻으면서 우리에게 자유로운 창작곡을 주심이 얼마나 깊은 은혜인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새노래는 곧 구원의 증표요, 그와 함께 하는 의미이다. “사명자가 작곡한 곡”이어서 따르는 자들만 배울 수 있음을 진정 깨닫는다.
내게 어제 보내온 유튜브 새노래 찬양곡을 새벽에 듣고 있는데, 그 음성은 진정 물소리와 같고, 거문고 소리와 같고, 찬양곡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이 모두 있으니 아!!! 얼마나 아름다운 찬양곡이던가. 과연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작곡하시고, 성령님께서 작사하시고, 시대 사명자의 입술을 통해서 그 찬양곡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니, 그 새노래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귀한 시간이던가. 앞으로 자주 유튜브 새노래가 삶속에 흐르게 하여 배워야겠다.
[시편 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과연 시편의 예언이 지금 이 시대에 그대로 성취되고 있으니, 그의 새노래 창작이 전반기 개사곡을 허물고, 성경의 예언을 완성하는 깊은 묵시이니, 새노래 찬양에 더욱 매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