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시야와 느고의 안타까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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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새벽말씀 주제는 ‘오해 풀기’였다. 정보혁명의 시대, 문화의 시대, 인식의 시대, 의미의 시대, 감정의 시대, 감동의 시대, 성령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의 방향’이다. 잘못 아는 것과 잘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동방박사들의 자신들의 연구논문 결과를 헤롯 대왕에게 보고하자, 그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베들레헴 대학살의 참극을 초래했다.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천문학을 연구하다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발견한 별의 이치였는데, ‘유대인의 왕’을 ‘정치의 왕’으로 오해한 헤롯대왕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고 5.18 대참사처럼, 6.25처럼 자국민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오해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불신하고, 스승과 제자가 등을 돌리고, 충성자가 역적이 되고, 하늘의 사명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주홍글씨는 쇠사슬처럼 남겨진다. 모두 오해의 총이 아군을 적으로 잘못 판단한 결과다.
그가 말씀했다.
“믿어주면, 맡겼으면, 사연을 들어보아라. 사연을 들어보면, 오해가 풀려 이해가 된다.”
성경에 요시야와 느고의 사건이 딱 이러했다. 하나님은 본래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을 중심한 유럽문명의 통일제국’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하면, 주변 국가에서 각종 보물을 가지고 사절단을 보내도록 하나님은 종교의 중심국가로 삼았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께 정말로 잘해서 지혜의 왕이 되었는데, 그 지혜로 이방민족의 여자들을 결혼외교로 취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께 잘 보이기보다는 주변국과 화친정책을 펼쳤다. 그러다가 주변국에 끌려다니면서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당했다. 하나님의 국가는 오직 하나님께 잘 해야한다. 왕비가 왕을 오직 사랑해야, 왕은 왕비를 백성과 귀족 가운데 높인다. 이스라엘의 위치가 그러했다.
요시야가 마치 고종처럼 뒤늦게 정말로 깨달았다. 종교중심 국가 이스라엘의 부국강병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청년 시절 그러했고, 중년 시절의 기록은 성경에 없다.) 그 어느날, 느고가 이스라엘의 영토를 넘어섰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것이다. 요시야는 급히 군대를 보내서 방비했다.
느고는 “내가 싸울 적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갈그미스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비켜라”고 했고, 요시야도 “알았다”고 했는데, 믿어주지 못한 요시야는 변장하고 느고와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 요시야가 하나님의 역사를 오해했던 것이다. 느고는 갈그미스를 없애려고 하나님이 보낸 군대 사명자였는데, 오해해서 싸우다가 요시야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좋은 정, 나쁜 정이 들었던 사연있는 관계였다. 요셉을 통해서 이집트는 경제의 구원을 받았고, 400년 노예생활에서 풀려나 모세때 탈출했다. 느고가 갈그미스를 치려고 일어났던 그 시기는 바벨론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바벨론은 아브라함이 떠나왔던 곳으로, 유럽문명에 비하면 보다 우측에 위치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지역이다. 이집트-이스라엘-앗스르가 하나로 연결된다면 예수님이 탄생하던 그 시기에 오리엔트 통일제국이 만들어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수 있었다.
물론 국가와 국가의 연맹체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생활 보다는 훨씬 좋은 위치에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시야가 오해해서,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를 받지 못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포로생활로 기울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는 솔로몬 시대부터, 점점점 기울어져서 요시야 때 간신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었으나,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정상회담이 이뤄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스라엘 왕이 죽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상대가 믿어주지 않으면,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불신한 상태에서 계속 말하면 불신은 더욱 깊어져서 그렇다. 믿어줄 때 진실을 말해야 그 오해가 풀린다. 내 인생에서도 이러한 사건이 정말로 많았고, 오해를 풀 때는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었다. 오해하면 상대를 통한 구원의 문이 닫히고, 오해를 풀고 이해하면 구원의 문이 열린다. 만사가 그러하다. 그래서, 기도해야한다. 하나님과 기도로 연결되면, 오해가 풀려서 이해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오해를 이해로 바꿔주신다. 또한, 상대를 믿고, 사연을 들어보면 자신의 무지와 오해가 풀려서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오해했다. 빌라도가 만약 예수님을 도와줬다면, 로마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친구가 황제였고, 후계자가 없었으니, 빌라도가 최우선권에 있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빌라도가 어찌 되었는지 역사가 증명한다.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빌라도는 칼리굴라(티베리우스의 조카)에 의해 뇌물죄로 소환당해, 결국 자살했다. 오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두산백과 백과사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 때 유대의 제5대 총독, 빌라도는 사마리아인들의 학살사건 때문에 로마로 소환되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오해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고, 자신은 준비하는 자로서 ‘넘겨줌과 멀어짐’으로 수수방관했다.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으면, 자신의 구원문제도 직결된 것인데, 몸짝 붙이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수족이 되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 오해해서 그렇다. 오해하면, 자기 자리를 뺏는 것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자리를 뺏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를 더욱 빛내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으니, 세례요한은 결국 목이 잘렸다.
오해는 보이는 것으로만, 자기 인신관으로만 볼 때 발생하는 인식의 불순물이다. 내가 길에서 담배 꽁초를 주웠다. 그 모습을 본 성도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오해했다. 나를 보면서, “담배는 몸에 안 좋아요”라고 했다. 나는 “담배 안 피웠어”라고 하니, 그 성도는 “제가 다 봤는데, 거짓말 하시네요”라고 했다. 나는 엉겹결에 거짓말하는 흡연가로 전락했다. 인식관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청소하려고 주운 담배꽁초가 오해의 불씨가 된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담배꽁초는 절대로 안 줍는다.
에어컨 청소를 하려고, 편의점에서 아침 ‘참이슬 소주’를 샀다. 자주 가던 편의점인데, 알바생이 나를 한참 쳐다봤다. 속 뜻은 “아침부터 술이냐”는 것이다. 침이슬만 보면, 내가 아침부터 술을 마신 것이 되버린다. 이렇게 오해는 인식의 술에 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