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까마귀밥의 정체
구약을 대표하는 두 인물을 선정하면 엘리야와 모세다. 엘리야는 우상박멸을 위해 정치의 왕, 아합과 홀로 싸워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했다. 모세는 이집트에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켜 율법과 제도를 마련했다. 두 인물은 구약의 핵심인물이다.
‘문자적 맹점주의’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 ‘엘리야와 까마귀밥’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 부흥집회에 자주 인용된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통해서 식사문제를 해결했다는 기록이다. 성경은 절대적 진리이니, 그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절대믿음’에 위배되니, 과연 믿음으로 ‘아멘’해야한다. 그런데,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 식사를 꼬박꼬박 서빙했다니…. 도대체 어떻게?
열왕기상 17장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정명석 목사님의 성경해석을 통해 나는 순천고 2학년때 “까마귀는 우상숭배자, 아합은 왕 까마귀, 이세벨은 여왕 까마귀”라고 배웠다. 그 근거는 3가지다.
첫째, 떡과 고기다. 보통 식당에 가면, 손님이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한다. 그런데, 엘리야는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까마귀가 가져온 떡과 고기를 먹은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법이다. 아침에도 삼겹살, 저녁에도 삼겹살, 다음날도 삼겹살을 먹으면 삼겹살만 봐도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그런데 까마귀는 계속 ‘떡과 고기’만 가져왔다. 이것만 봐도 ‘떡과 고기’는 엘리야의 의중과 상관없이 배달된 음식이다. 요즘 배달의 민족 어플만 봐도,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주문한다. 까마귀가 만약 정말로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면, 저녁때 엘리야는 전혀 다른 음식을 주문했을 것이다.
둘째, 아침과 저녁이다. 사람은 ‘점심식사’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점심(點心)은 마음에 점만 찍는다고 해서 점심이다. 과거 농업중심 사회에서 점심은 간단하게 먹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중간에 참을 먹었다. 그래서 점심은 점을 찍는 정도였고,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엘리야는 점심 자체를 먹지 못했다. 아침에 떡과 고기를 먹고, 저녁에 떡과 고기를 먹으면 점심은 공백기간이다. 물론 아침에 배달된 떡과 고기를 남겨서 점심에 먹을 수도 있다. 까마귀가 정말로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면, 배달시간을 조정할 수도 있는데, 성경기록을 통해 보면, 배달시간은 까마귀에게 맞춰졌지, 엘리야에게 맞춰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사르밧 과부의 등장이다.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의 식사문제를 모두 해결했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식사제공이 중단된다. 그리고 사르밧으로 이동하라는 말씀이 떨어졌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식사문제를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해결받았다. 즉, 사람을 통해 식사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조류’가 아니고, 사람이다. 그처럼 요단강 근처에 숨어살던 엘리야가 식사문제를 해결한 것도 ‘사람을 통해서’였다. 까마귀는 제사음식을 가지고 온 ‘우상숭배자’(무당 및 제사장)들이었다.
제사음식에 빠지지 않는 것이 떡과 고기다. 떡과 고기는 사람으로서 신앞에 가장 정성을 다하는 음식이다. 제사시간도 아침과 저녁이다. 점심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사람은 점심때 가장 맛있는 식당을 찾지만, 제사음식은 아침과 저녁때 드린다. 까마귀는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표현된 비유였다. 이처럼 성경의 언어는 ‘비유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얼마전, 어떤 단체 협회장을 만났다. 창문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먹을 것을 물고 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날 내 점심은 그 까마귀밥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다. 까마귀가 물고간 까마귀밥은 까마귀가 먹을 그날 식사였고, 나는 협회장을 통해 점심을 해결했다. 사람의 식사문제는 이처럼 사람을 통해 해결한다. 까마귀가 사람의 식사문제를 해결해줄 수가 없다. 까마귀를 통해 식사문제를 해결한다면, 아마도 까마귀 고기를 잡아서 해결하는 방법이 묘책일 것이다.
식사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의 3대 시험에서 첫 번째 시험문제가 식사문제였다. 40일을 굶은 것을 빌미로 사탄은 ‘먹는 문제’로 시험했다. 배가 고플 때는 밥이 가장 중요하다. 월명동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자동차에 기름을 반드시 주유(注油)해야 차가 운행된다. 식사는 육신의 에너지 공급이다. 힘의 공급없이 육신은 움직일 수 없으니, 식사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면서, ‘식사문제’를 무엇보다 챙긴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식사문제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태복음 4장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인생의 영혼이 살아간다. 식사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식사문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고 살았으니,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엘리야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식사문제를 해결하심을 알 수 있다.
인생은 먹는 문제 때문에 영적 문제를 멀리하는 실수를 자주 범한다. 식사문제 때문에 영혼의 문제를 점점점 잃게 되면, 그 사람은 아합과 같다. 까마귀를 2글자로 줄이면 ‘마귀’다. 인본주의의 상징이 곧 까마귀다. 아합왕은 국가운영에 있어서는 탁월한 정치력과 외교력을 발휘한 능력의 통치자였다. 왕비는 페니키아 출신의 공주였다. 솔로몬이 결혼을 통해 국제정세의 외교력을 발휘했듯, 아합도 그러했다. 결혼정책을 통한 왕권강화는 태조 왕건도 사용했던 전략이다.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하고, 이세벨의 이방문화를 그대로 존중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이세벨은 자신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의 종교를 활성화시키려고,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와 종교 지도자를 숙청하고, 농업정책 장려활동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크게 장려하고, 국가의 종교정책으로 널리 보급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하나님은 아합을 축복할 수가 없었다. 아합은 주변국가와 외교문제를 해결하려고 이세벨과 결혼하고, 농민들의 풍년을 기념하려고 농업의 신, 풍년의 신으로 바알과 아세라의 종교를 보급했던 것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했던 것이다. “아합은 악한 왕”으로 규정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왕’이다. 하나님이 볼 때, 하나님의 기준에서 ‘어떠하냐’가 곧 ‘선과 악’의 분별점이다. 선과 악의 자체보다 ‘누가 보기에’가 가장 중요하다. 아합이 보기에 악한 자는 ‘엘리야’였다. 그렇다고, 엘리야를 ‘악한 선지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합이 보기에 악한 엘리야이니, 그러하다. 아합과 엘리야는 모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살았다. 단지, 아합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부국강병을 추구했고, 하나님의 관점은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했고, 이스라엘의 영적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예수님의 첫 설교로 유명한 산상수훈 중에서 ‘마태복음 6장 31절 이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6:31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엘리야와 까마귀밥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합왕 나쁜 놈”이란 생각이 들면, 그것은 얕은 신앙이다. “가라지 나쁜 놈”이란 생각이 들면, 그것도 얕은 신앙이다. “내가 까마귀다”라고 깨닫는다면,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내가 까마귀다”고 깨닫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엘리야도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곧 까마귀이고, 선한 것이 곧 엘리야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관점을 깨닫는 것이 이 강의의 근본 핵심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기 바쁘다. 살아야한다. 사람은 왜 사는가? 먹기 위해서? 먹는 문제는 이처럼 중요하다. 먹는 문제와 사는 문제와 영적 문제는 항상 충돌한다. 3가지 문제에서 과연 영적 문제를 최우선에 놓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먹는 것은 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인데도, 먹는 것만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인 인생의 폐단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까치처럼, 파랑새처럼 자유롭게 날개치는 것 같은데, 그 날개짓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까마귀같을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한다. 과연,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이 순간 어떠한가?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