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眞理)는 외국어와 흡사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로마법이 통치하고, 로마에 입국하고 그곳에 거주하고 살아간다면 로마법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달에서는 달의 만유인력, 지구에서는 지구의 만유인력으로 중력장이 작용하는 것과 같고, 태양계에서는 태양의 만유인력이 행성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법은 국가를 통치하고, 언어는 사상과 문화를 다스린다.
진리는 외국어와 흡사하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그 나라 문화와 사상과 언어를 자세히 배우고, 외국의 입장에서 외국어를 배울 때 학습효과가 가장 좋다. 외국어의 학습에서 ‘실천과 행동’은 발음이다. 혀로 말하는 것이 외국어의 실천이다. 특히 외국인과 대화가 ‘완벽한 실천’이다. 그와 같이 진리는 배움과 실천이 함께 진행되고, 배운 것은 행위로 실천할 때 그 효력이 제일 좋다.
영어로 ‘I’는 ‘나’다. 발음은 ‘아이’다. 발음만 들었을 때는 ‘아이’(兒)로 들린다. 영어로 ‘She’는 ‘그녀’다. 발음은 ‘쉬’다. ‘조용히’를 의미하는 ‘쉬’로 들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발음의 뜻으로 이해하면 영어는 뒤죽박죽이 된다. 외국어에서 발음은 외국인이 의미하는 발음의 뜻이듯, 진리도 하나님이 생각하는 입장에서 의미와 뜻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가장 많이 강조되는 문장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신본주의(神本主義)는 하나님을 중심하는 사상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는 삶이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은 인본주의다. 자기가 보기에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기주의’(利己主義)다. 국가가 보기에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민족주의’(民族主義)다.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함’을 알아가고, 실천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다. 그때 예수님은 “날씨는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때는 분별하지 못한다”면서 심각하게 책망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표적’을 구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장 큰 표적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한 진리’였다. 4천년을 계획해서 준비한 인물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활동하는 그 때였으니, 얼마나 가슴 졸이며 긴박하고 행복한 표적의 순간이었을까?
‘구원’(救援)은 건짐을 받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400년동안 포로생활을 했고, 포로생활에서 해당되길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래서 민족을 구할 사명자로서 모세를 보냈다. 그것이 이집트 탈출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바로왕을 벗어나서 이집트를 탈출했으니, 이적과 기적이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구원이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바로왕에서 벗어났다면, 모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40년동안 신광야에서 방황했다.
신약의 구원주였던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과정은 마태복음 3장에 자세히 나온다. 시험문제는 3가지였다.
Q1. 돌이 떡이 되게 하라
A1.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Q2.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A2.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Q3. 세상을 줄테니 절을 하라
A3.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
마귀의 시험문제는 ‘유혹’이며, ‘제안’이며, ‘아이디어’이다. 마귀같은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정답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고, 행동하는 것이다. 진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진리의 첫 번째’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6)
위 성경구절은 정말로 유명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다. 위 사건은 예수님때도 그렇고, 각자의 인생에게 정말로 중요하다.
(마태복음 16장 13절~ )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의 사명을 깨달은 것이고, 그것을 깨닫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진실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명자를 깨닫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을 깨닫는 것이 ‘반석의 신앙’이 되는 첩경이다. 이것을 깨닫고서 그때부터 베드로는 반석이 되어갔다. 이 시대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시대 사명자의 위치’를 진실로 깨닫는 것이 반석의 신앙이다.
축복(祝福)은 복을 받는 것이며, 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다. 자신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이뤄지는 것이 곧 ‘복’이다. 기복신앙(祈福信仰)은 복을 기도하는 신앙이다. 축복을 받길 원하면,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행하면 된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듯이, 하나님이 내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한 자는 모두 성공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서 성공했다.
2.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와 관용의 길을 걸어서 성공했다.
3. 에스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믿음의 길을 걸어서 성공했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삭의 재물을 바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어 성공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실패했다.
1.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행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2.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사명자를 배신하고, 돈을 받고 팔아서 실패했다.
3. 유대인은 구원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영원히 실패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의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의 시작점이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우주와 지구와 만물의 창조’였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도록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곧 ‘영혼의 재창조’ ‘사람의 재창조’ ‘인생의 부활창조’인 것이다. 잘 되길 원하기 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항상 ‘하나님이 보시기에’의 단서조항을 맨 앞에 두는 것이 신앙인의 첫 번째 덕목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하냐는 ‘하나님의 사명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공통성의 진리는 성경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며, 자신의 생활속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기도와 사물과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을 영감과 생각으로 깨달아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예배, 수요예배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은 곧 내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배우고 알아가는 것이다.
창세기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神看光是好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