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년동안 모아둔 명함들을 일괄 정리했다. 명함관리 앱(어플)을 다운받아서 3시간 정도 작업했더니 10년동안 모아둔 명함들이 핸드폰에 그대로 입력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내가 직장을 옮기면서 새롭게 만들었던 ‘명함들’이다. 오래된 명함들을 들여다보니, 지난 세월이 새롭다. 과거 그때 지금의 이때가 올 줄 알았다면 명함을 모아둘 것을…..
사회에 첫발을 딛는 사람에게 ‘멘토링’을 하라고 한다면, 명함관리와 함께 자신의 명함을 얼굴로서 디자인하고, 회사를 옮길 때마다 지난 명함들을 추억삼아 모아두라고 권하고 싶다. 인생은 누구나 중년의 세월을 지나므로…..
내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했던 것이 2002년 정도 된다. 그때, 나는 종로교회 성전관리부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오직 교회에서 신앙 하나만을 붙잡고서 열심히 생활했는데, (본래 나의 고등학교 시절 꿈은 목회자였었다) 이후 에디코라는 과외전문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지금도 신설동에서 매우 잘 번성하고 있다. 기존 대학생들의 과외시장이 ‘시험기간’과 겹치면 불성실한 과외로 끝나기 십상, 이러한 틈새시장을 노려서 에디코는 ‘과외전문 교육회사’로서 급성장했고, 내가 취직했을 때는 회사가 막 성장하는 초기 단계였다. 나는 촉망받는 ‘대리’였다. (대리를 단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과외실력이 없었던 것 같다. 중간고사만 보면 학생들은 성적이 뚝뚝 떨어졌었다. 그때마다 나는 항상 “학교 시험이 정말로 어렵게 나왔어요”라고 둘러댔지만, 성적이 일단 오르지 않으면 과외는 금방 끊어진다. 그 당시로 20만원의 과외였으니, 학생 1명이 떨어지면 월급에서 10만원이 빠져나갔다.
만약, 지금 에디코 회사에 다시 들어가라고 한다면, 나는 현장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보다는 ‘사보’를 제작하거나 홍보파트에서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내가 에디코를 그만두려고 했을 때, 회사측에서 그러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만뒀다. (돌이켜보면 아쉽기도 하다.)
에디코 교육전문 회사는 정말로 독특한 회사다. 김영철 사장으로 기억된다. 유도선수 출신인데, 얼마전에 언론인협회에서 ‘상’까지 받은 것으로 언론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에디코에는 교육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철 대표이사는 직원들에게 ‘교육복지’로서 상당히 많은 투자를 했다. 프랭클린 다이어리에서부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등등 세계적인 정신훈련 교육 프로그램을 직원들이 받도록 했는데, 어떤 교육은 300만원 이상의 교육비가 들기도 한다.
에디코 교육회사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남자였고, 총각이었던 청년으로서 촉망받는 직원이었는데, 진급을 앞에 둔 나는 에디코 회사를 그만 뒀다. 그만 둔 이유를 지금 더듬어보면, IMF 이후 카드대란으로 돌려막기에 실패했기때문. 중간고사를 망치면 학생들이 3~4명 그만두게 되는데, 회사에서는 다시 3~4명을 연결해주지만 공백기간이 생겨서 월급이 50만원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게 상당히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만약 내가 에디코 과외전문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열정 강사로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학생들은 1:1로 강의를 했는데, 직원들에게 강의를 했던 적이 있고, 그때 전체 직원들이 나의 말에 상당히 호응해줬다. 김영철 대표이사도 나를 눈여겨 봤었는데, 카드대란으로 돌려막기에 실패했던 나는 에디코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명함따라 세월따라, 나의 에디코 교육회사 시절, 나는 대리로 승진을 앞둔 ‘남자 교육강사’였는데, 국가 경제대란과 나의 낭비벽 때문에 교육의 길을 접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언론인으로 활동한지 벌써 10년, 요즘 나는 블로그 교육, 저널리즘 교육, SNS특강 등을 하고 있으니, 인생은 돌고돌아서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며 사는가 보다.
그때 나를 참 좋게 봤던 대리가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같은 그녀의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나에게 참 잘해줬는데, 내가 참 못해준 것 같아서 에디코를 그만두고서 오랫동안 미안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지숙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