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성경은 떠남의 역사다. 창세기가 특히 그렇고, 계시록도 떠남에서 정착으로 완성된다. 따뜻한 아랫목이 천국인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곳을 깊은 어둠으로 칭하고, 그곳에서 빛을 분리해서 떠남을 창조하신다. 이것이 창세기의 시작점이다. 모든 익숙함에는 노예의 속성이 존재하며, 그곳을 떠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길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진정 믿는다면 떠남의 문이 열린다. 모든 익숙함과 결별, 그것이 길위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집과 길, 그것은 정착과 떠남이다. 집은 정착, 길은 떠남이다.
아브라함은 떠났다. 갈대아 우르, 다른 말로 갈대아 도시를 떠나서 이민을 갔다. 그곳이 가나안이다. 베트남 여성이 국제결혼을 해서 한국에 정착하듯, 유대민족이 디아스포라의 유랑민이 되듯, 우리 조상이 만주와 연해주로 독립투쟁을 위해 떠나듯, 경제부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처럼, 그렇게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를 떠났다. 하나님은 깊은 어둠에서 빛을 분리해서 ‘낮’으로 호명하듯, 지명해서 불러냄으로 떠나게 하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12: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서 43:1)
게르만족의 대이동처럼, 유대민족의 대이동은 4번 있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정복, 바벨론 포로생활, 유대인의 귀환이다. 사람이 이사를 하는 것은 포장이사를 해도 참 힘든 일이다. 하물며 민족의 대이동이랴. 하나님과 성령의 포장이사가 없다면 결단코 성사될 수 없는 민족의 움직임이다. 히브리 민족의 단결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그 민족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4번의 민족 대이동도 ‘떠남과 정착’의 역사이다.
안락함의 가정이 때론 모래시계처럼 뒤집힌다. 내가 그러했다. 편안한 소파를 내가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의자 대신에 불편한 달음질을 하게 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랑에 정착을 꿈꾸던 한 청년에게 하나님은 결별을 선언함으로 낯선 고독을 걷게 하셨다. 돌아보면, 나는 길위에 있었다. 내가 편안한가. 그 편안한 아랫목의 집주소가 이집트다. 예수님은 편안함과 타협하지 않았다. 경제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마귀의 제안에 손을 잡지 않았다. 어쩌면, 마귀의 제안이 평화로울 수도 있었을텐데….. 정녕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렀다. 그 부름이 바로 창세기 1장의 역사다. 깊은 어둠에서 빛을 분리해서 낮이라고 부르듯이, 많은 사람중에서 분리해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이다. 이름이 불리는 것은 곧 집을 나서는 것과 같다. 따뜻한 아랫목에 갇혀 살 수도 있으나, 찬바람을 맞을지라도 집밖으로 나서는 것, 그것이 길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일이다.
하나님은 불청객처럼 낯선 문을 열게 하실 때가 많다. 다문화처럼, 그러하다. 아브라함은 갈대아에서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이사하다가 하나님의 뜻위에서 인생을 끝냈다. 야곱은 가나안에서 갈대아 근처 밧단아람으로,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이사했다. 요셉은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유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낯선 길위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갔다. 길위에 ‘사막의 광풍’이 있고, 고독과 고뇌가 있다. 낯선 환경의 변화속에 하나님은 그 존재를 입증하신다. 아멘!! 나는 그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