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이 답일 때가 많다. 평생 살아오면서, 나는 이 신조(信條)를 꺽지 않았다. 염탐(廉探)이나 탐색(探索)은 내게 어울리지 않다. 미디어 비평 전문지에서 근무했을 때, 재건축재개발 전문지에서 근무했을 때, 교육언론사 기자로 활동할 때, 정직의 신조를 지키려고 몸부림쳤다. 본 대로 의견을 썼던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은 항상 나의 방패막이 되었다. 취재원과 약속은 그래서 항상 지켰다.
정직은 멀리 있지 않다.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조직의 전달사항을 말하는 것은 조직의 구성원으로 정직이고, 사람과 사람의 마음교감은 전혀 다르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통이고, 마음이 서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절이다. 정직함은 그렇다.
인생을 살면서, 염탐과 탐색과 고발의 편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리새파의 속성이 강하다. 바리새파는 항상 예수님의 설교를 녹음하듯이 녹취해서 꼬투리를 잡을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이 입장 곤란할 질문을 던짐으로 율법을 범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유도했다. 참 몸쓸 족속이다. 그래서 나는 녹음이나 녹취는 거의 안한다. 취재할 때도 거의 하지 않고, 내 허락없이 녹음을 하는 족속은 인간 취급을 안한다. 최소한에 지켜야할 사람으로서 상식을 지키지 못하니,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라면, 사람의 마음을 갖고, 양심을 지키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직은 멀리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까워지려면, 마음으로 다가서야한다. 사상으로 다가서면 안된다. 마음으로 다가서야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다. 그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과연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정직함으로, 계급을 구분하지 않고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강론하고, 설득하고, 모범을 보이셨다. 그런 예수님의 성품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