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인생은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변화해야하고, 20년이면 도시가 변하듯 변화해야한다. 국가는 국계법에 따라 도시기본계획을 20년 주기로 실시한다. 10년은 강산, 20년은 도시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인생도 10년, 20년이면 완벽한 새로움으로 변해야한다. 그것이 말씀을 따라 사는 표적의 역사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느브갓네살 왕도 7년만에 우슬초를 먹으면서 새롭게 변화해서 제2의 인생을 살아냈다. 말씀을 받고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변화’로서 그 표적을 나타낸다. 말의 능력은 삶의 변화로 표출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실한 역사다.
예수님의 3대 시험은 ▲경제 ▲능력 ▲권력을 의미한다. 3가지는 인생이 겪는 가장 보편적인 속성이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듯이 경험하는 것이다. 보이스 피싱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듯이, 3대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 있다. 예수님의 행함으로 하면 된다.
성경의 능력, 말씀의 능력은 성경해석과 전혀 다르다. 말씀따라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함께 행하신다. 창세기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인생이 말씀따라 살면, 창조적 역사가 펼쳐진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이 말씀따라 살았으므로 결국이 잘되었다. 말씀은 곧 잘됨으로 증명된다.
시험문제 1번 :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시험문제 2번 : 뛰어내리라
시험문제 3번 : 절을 하라
시험문제 1번의 답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종교적 열심을 내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이 보았어도 말씀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게 봤다. 몇몇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를 말한다. 근본의 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앙의 습관이 흩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근신해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나침반, 삶의 네비게이션으로 삼아야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떡은 돈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혹은 직장이다. 취직이 안될 경우, 대학에 떨어질 경우, 사업이 실패했을 경우, 결혼생활이 파탄되어서 이혼했을 경우, 원하는 꿈이 산산이 부서질 경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파선되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에도 말씀을 따라 살기로 더욱 결심하셨듯이, 3년의 목회사역에서도 경제중심 목회보다는 생명중심 목회사역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뜻길을 가셨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 말씀이 떡이 되게 하는 것, 인생은 떡을 먹어야 사는데, 말씀으로 떡을 창조할 것인지, 돌로 떡을 창조할 것인지, 둘 중의 하나다. 돌로 떡을 만드는 사상은 마귀의 생각이다. 사람의 방법으로 떡을 만드는 것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반면, 말씀으로 떡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 하갈의 방법이고, 말씀으로 떡을 만드는 것이 약속의 자녀이다.
시험문제 2번의 답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이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 뛰어내리면 골절상을 입게 되고, 죽음의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그때 천사가 받쳐준다는 것은 곧 생명의 보호이다. 인생은 누구나 병마에 시달린다. 육신의 고통에 직면하고, 모든 종류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때마다 슈퍼맨이 나타나서 해결해주길 고대한다. 이것이 2번째 시험문제이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흔들림이 없는가?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유혹했다. 그때 예수님은 역시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 사건은 나중에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된다. 모든 교회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에 메달린 에수님을 향해서,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메달리듯 운명처럼 속박당하는 뜻의 길을 갈 때, 우리는 ‘거부와 도망침’으로 비겁한 베드로가 된다. 성전꼭대기는 곧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위치를 상징한다. 그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위치를 벗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시험문제 3번은 권력이다. 답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이다. 예수님은 목회활동을 하시면서 성도들에게 굴종의 신앙을 명령하지 않았다. 오히려 섬김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 삶을 통해 말씀이 실현된다. 예수님처럼 성도를 진심으로 섬기는 목회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말씀의 언변은 있으나,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사역자는 드물다. 섬김과 경배의 대상은 오직 ‘주 하나님’이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사람이 섬김의 대상이 될 때, 마귀가 권력을 갖게 된다. 시험문제 3번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렇다. 마태복음 4장은 마귀와 예수님의 설정으로 나와서 “역시 예수님”이라고 이해하겠으나, 현실에서는 전혀 다르게 표출된다. 마귀는 권력자이고, 예수님은 권력에 예속된 자이다. 역사적 사건으로 비유하면, 마귀는 교황이고 예수님은 루터다. 마귀는 빌라도이고, 유대교이다. 권력앞에서 과연 ‘하나님을 섬기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이라서 그렇다. 예수님은 마귀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귀가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었어도 그러했다. 마귀가 장관이면, 장관위에는 대통령이 있고, 대통령 위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예수님은 더 높은 곳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의 신본주의로서 살았고, 행하셨다. 교회나 교단의 과잉 충성파는 ‘3번 시험문제’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 성령을 각 사람에 값없이 부어주심으로 신본주의가 되게 한 것이다. 핍박하는 바울까지도 관용과 용서로 포용했다. 갑작스런 출현으로 말에서 떨어진 바울이 시력을 잃자, 아나니아 선지자에게 치료를 받는 방법까지 알려주셨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등 모든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다. 율법은 구속하고, 말씀은 자유를 준다.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철저히 교육하면서, 따르는 자들을 섬기는 모범을 보이셨다. ‘나를 경배하라’는 사상은 마귀의 속성이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사상이 바로 성령의 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