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면죄부’를 정면으로 도전한 루터.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으나, 추천을 받아 본 영화 ‘루터’를 보고 나서, 구원의 반대편에 떨어질 각오로 신념을 추구했음을 알게 됐다. 지금의 기독교, 루터와 피흘림의 순교자들이 있음으로 가능했다. 구원으로 가는 좁은문은 지금도 바늘귀처럼 작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확률게임이 아니다.
*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 면죄부를 구입하면 연옥에서 풀려난다.
*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황을 역추적하면 베드로가 나온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었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뒤바뀐다. 반석이 곧 베드로가 된 것이다. 교황의 권위가 곧 그리스도가 되면서, 중세사회는 베드로의 세상이 되었다. 다른말로 ‘교황의 세상’이 된 것이다. 순교의 위험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예수님을 막아섰던 베드로였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결정적 순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영화 루터에서 교황의 권위를 ‘그리스도의 반석’으로 정면 비판한다. 교황의 권위가 어찌 베드로를 통해서인가. 그 권위의 출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결국 교황도 성경속에 존재할 뿐, 성경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런데, 교황은 성경을 권좌의 방석으로 삼았으니, 하나님은 신의 자리를 찬탈한 교황과 인본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루터와 같은 혁명가를 보낸 것이다. 루터가 했던 일은 독일어 번역성경이다. 성경이 로마에 있었다면, 루터를 통해서 독일 시민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그때부터 독일시민은 ‘앎으로’ 속지 않게 된 것이다. 면죄부를 산다고 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근본 출처가 어디에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자신의 영혼이 구원될 수 있다.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 물음이 깊은 고뇌요, 두려움이요, 갈등의 늪이었다. 나는 그러했다. 평범한 삶을 살길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무슨 까닭에 내 인생의 채널을 돌림으로 폭풍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혼돈은 내게 구원의 방향을 헤깔리게 했다. 동서남북을 쳐다보는 내게 하나님은 하늘을 올려보게 하셨다. 구원은 어디로 말미암는가? 언젠가, 어떤 설교에서 “sky와 heaven을 구분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물질의 sky가 아니라 영적인 heaven을 뜻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친히 강림하심을 말합니다”라고 했었다. 구원도 그와 같지 않을까?
영화 루터는 그저 영화가 아니다. 지금도 인생에게, 사회에게, 문명에게 펼쳐지는 실제 사건이다. 예수님이 역사적 사건으로 실재였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각 인생에게 실재로 임하여 말씀을 육신으로 입증하신다. 나는 믿는다. 아!! 구원은 어디로 말미암는가? 루터가 교황의 가르침에 순복하지 않았던 것은 틀린 교리를 진리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와 같다. 교황의 말이 틀렸는데,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니, 교황은 모든 교황들의 이름으로 루터가 틀렸다고 겁박했다. 루터가 성경을 해석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인데, 정교회는 로마교회로부터 독립했다. 정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위에서 믿음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교황은 정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교황이 틀린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말미암는 것이지, 제도를 통한 졸업증이 아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반박한다. 아!! 얼마나 명쾌한 해답인가.
성경해석이 성경보다 절대화되면, 그것이 언어적 우상이 될 수 있다. 믿는 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중에 “제단과 제물중에 무엇이 더 거룩하냐”는 물음이 있다. 제단이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제단보다 제물을 더 거룩하게 본다. 즉, 하나님과 사명자중에서 사명자를 더 높게 본다. 사람이 신보다 더 높으면 그것이 인본의 우상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끝까지 섬김의 봉사를 다한 것이다. 제자들은 누가 높냐고 서로 키재기를 할 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기셨다. 권력투쟁은 곧 마귀의 속성이다. 성경해석도 그와 동일하다. 성경해석이 성경말씀보다 더 절대화되면, 모순이다. 오직 말씀위에서 성경해석이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문이 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께로 안내하시는 것이지, 문을 통과하는 통과세를 내라는 겁박이 아니다. 교황은 예수님의 문앞에서 통과세를 받은 인물이다. 성전건축의 명분으로 그렇게 했다.
레오 10세는 로마의 부흥을 외치면서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을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다. 면죄부를 팔게 되면, 판매자들이 돈과 결탁한다. 검은 커넥션은 로마 전체를 마귀의 손아귀에 빠뜨렸다. 레오 10세의 판단착오로 말미암아 성직자들의 타락이 교황의 이름으로 전염병처럼 퍼진 것이다. 성직자가 돈에 물들면, 평신도는 이미 늪이다. 면죄부를 사는 그 순간 신앙은 추락한다. 알 턱이 없는 순수한 영혼들이 매춘으로, 향락으로, 범죄로 내몰렸고, 면죄부를 사서 해결하면 된다는 인본주의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황의 이름으로 못박힌 사건인 것이다. 언젠가 어떤 설교에서 “교회는 말씀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한다”라고 했다. 그 말씀이 얼마나 마음에 와 닿던지, 잊혀지지 않는다.
교회건물을 세우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건사업과 같다. 흥선대원군은 10년동안 경복궁을 세우면서, 사원철폐를 통해 뺏은 막대한 자금과 기부금으로 건축자금을 마련했으나, 백성의 민심을 뺏겼다. 결국, 경복궁은 세웠으나 조선은 멸망당했다. 레오 10세도 엄청난 자금을 모금해서 성전을 재건축하려고 했으나 빚만 남기고 죽고 만다. 다윗도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으나 건축자금을 솔로몬에게 물려주고 사망했다. 다윗의 건축자금으로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이방인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왕궁을 우상전파의 통로로 만들었다. 솔로몬이 죽고서 이스라엘은 둘로 분열되었다. 이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해야 신앙이 온전히 선다는 것을 알려준다. 건물속에는 하나님이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과 함께 존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