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사자성어에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 있다. 양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말인데, 사자성어가 만들어진 시대에는 양고기가 상당히 비쌌고, 개고기는 저렴했다. 마치 한우라고 써놓고, 미국산 소고기를 판 것이다. 어떤 임금이 여자가 남장을 한 것을 좋아하자, 민간에 임금의 유행이 쫙 퍼졌다. 그러자, 임금은 백성을 통제했다. 그 사건이 바로 양두구육이다. 임금부터 하지 말아야, 백성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양고기는 왕의 법률이고, 구육(개고기)는 왕의 행실이다.
나는 10년, 10년, 10년, 총 30년의 신앙생활을 한 교단에 속해서 살아냈다. 언론인으로서 양측의 주장을 모두 듣는 것이 ‘진실을 확인하는 표준’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나는 구원의 절대적 믿음에 갇혀서 성경의 본질을 아는데 게을렀다. 그래서 요즘은 성경을 가깝게 하려고 몸부림친다. 내 인생사, 이혼은 몸이 둘로 갈라지는 사망선고였다. 그 사망은 여전히 나를 침울하게 한다. 죽음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영적 죽음이든, 육적 죽음이든, 결별의 죽음이든…..
내가 속한 단체에 대한 JTBC 보도를 봤다. 사실보도다. 며칠전 사건이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올해 내도록 10번 넘게 자원봉사를 다녀온 장소이기도 하다. 내게는 소중한 신앙의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사망사건이라니…. 그런데, 그 사건이 발생하고도 순회라니….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이 극치에 달한 것이다. 루터!! 그 사망사고가 그저 책임분담의 실수였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누군가 내게 김**씨의 이름 석자를 부르면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이곳을 떠나면,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막말로 부르겠구나. 김** 목사의 유튜브 영상을 봤는데, 흘려서 들을 내용은 아니던데….”라고 말했다. 언론인의 양심에서 말한 것이다. 내가 받은 구원의 증표가 박탈당할 수도 있는 발언이다.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구원의 다른 말은 면죄부다. 생명책이다. 과연 생명책에 영혼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누구로 말미암는 것인가. 월명동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와 순회는 엇박자다. 미국은 아버지 조지 부시가 사망하자, 트럼프조차 모든 일정을 멈추고 장례식에 함께 했다.
내가 배웠던 교리로 정치적 사건의 묵시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사건이다. 나는 그 교리를 진리로 배웠으므로,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令愛)인 박근혜 대통령의 탁핵은 하나님의 깊은 묵시가 있다고 본다. 영적 세대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세월호 침몰사건이 내 구원까지 침몰한다면, 어떻하나.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려고 면죄부를 팔았다. 교황의 명령을 받든 순회사들은 유럽 전지역을 다니면서 면죄부로 건축자금을 모금했다. 그렇게 거둬드린 돈으로 성전을 건축했는데….. 백성은 마귀의 늪에 점점점 빠져들었으니….. 얼마나 모순인가. 교회와 성도, 누가 더 중요한가? 성전건축을 한다고 해도, 성도를 뺏기면 무용지물이다. 말씀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 그것이 그리스도 본연의 사명이다. 교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루터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두 정신차려야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전혀 다르다.
시작은 미약하나, 돌이키지 않으면 그 무너짐이 처참하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은 십자가 사건이후 40년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영원한 디아스포라의 형벌에 처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세웠으나, 나라를 뺏겼다. 대한민국이 공산주의로 물들면, 성전도 국가소유가 된다.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세종시에 넘겨진 행정권도 서울로 복귀될 것이다. 부분만 보는 소경들은 전체를 내다보지 못하니, 어리석음을 반복할 뿐이다. 그 무슨 변명으로도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축제의 순회가 계속 진행된 것은 슬픈 일이다. 하나님이 과연 그 축제에 동참했다는 것인가? 그러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내가 믿는 양심으로 기록을 남긴다.
나는 굴종의 신앙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므로. 그저 자원봉사자의 사소한 죽음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비극이다. 그 무슨 변명으로도 축제의 순회는 아니다. 구원을 명분삼아 자유를 겁박하는 것은 인본의 굴레일 뿐이다. 신본주의로 돌이켜야 선교도 되고, 성도들의 개성이 발현될 것이다. 제발,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해당 내용은 개인적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