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2가지 관점을 가져야한다. 하나는 작가관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작가관점은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그러한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이다. 하나님의 의향이 바로 뜻이다. 뜻 지(志)는 선비 사(士)와 마음 심(心)의 합성이라서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다라고 해석하는데, 士는 之의 변형이다. 마음이 가는 곳이 바로 뜻이다. 뜻은 마음의 움직임, 마음의 방향이다. 하나님의 뜻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말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했는데, 언어로는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영상활영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듯이 그렇다. 작가의 관점에서만 기록할 수 밖에 없다. 기록의 창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져야한다.
마태복음 1장1~17은 족보장이다. 17절~25절은 탄생설화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신비주의다. 로마의 시조도 늑대가 두 쌍둥이를 먹였다는 설화는 신화와 같다. 마태복음 1장은 족보와 탄생설화 2가지로 되어있다.
마태의 의도는 매우 간단하다. 유대인이 학수고대한 다윗왕의 정통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왕 사상은 마태복음의 핵심이다. 한국의 정감록 사상과 매우 흡사한데, 당시는 로마황제가 다스리던 때였으니, 예수님을 중심하는 기독교 사상은 정치적 이유로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마태복음은 로마 시민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히브리 민족을 위해서 집필된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직설화법에 가깝다. 정감록 사상이 지배적이던 조선 중기에 “정감록에 예언된 정도령은 000이다”라고 풀어쓴 서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정감록을 활용한 직접 포교활동이다. 마태복음은 그와 같다.
조선시대로 보면, 왕권쟁탈전이 매우 심했다. 왕이 되려면 적통의 자격이 있어야했다. 왕의 계보는 왕권의 설립자로 이어진다. 이사야서에 예언된 이새의 줄기가 곧 다윗왕조를 예언했고, 혈통적으로 그 예언을 이뤄야 ‘메시야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그 예언의 답안지를 도입부에 내세운 것이다. 한국인에게 족보는 매우 친숙하지만, 현대인에게 족보는 낯설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라서 그렇다. 반면 고대사회는 씨족사회였고, 가족중심의 민족사회였다. 그 시대는 뿌리가 매우 중요했다. 그 시대 사상으로 비쳐보면, 마태복음의 편집방향은 상당히 세련된 것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족보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족보가 서로 다른 것을 놓고,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마태복음은 아버지 요셉을 통해 거슬러 올라간 것이고,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통해 거슬러 올라간 것이며, 그 당시 족보를 통해 역추적한 거이니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네이버와 구글을 통해서 정보의 객관성이 검증되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족보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최종적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남았으나, 제1 원본자료가 있었을 것이다. 그 원본자료를 인용한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족보자체는 복음이 아니지만,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조명하므로, 복음이 된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모든 것이다.
세상의 왕은 혈연으로 자격을 갖출 수 있으나, 예수님은 탄생과 함께 그렇게 행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셨다. 세상왕과 다른 점이 이것이다. 혈연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상은 위험하다. 종족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요한복음에서 증언했듯이 말씀의 육신화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사연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태의 입장에서 피해가고 싶은 부분인데도 거론한 것을 보면,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입각해서 진실을 말하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어떤 측면에서 복음서는 과대포장보다는 부드러운 문체로서 진실을 덮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생물학적 아버지가 생략되었다. ‘생물학적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 신성불가침일 수 있도 있겠으나, 사람의 합리적인 의심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탄생의 시초이다.
인생은 무섭고 두려움의 연속이다. 동거하기 전에 약혼녀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은 불길한 징조다. 율법의 정의로움을 고집하면, 마리아는 죽음의 형벌이다. 그런데, 요셉은 율법의 형벌대신에 사랑과 포용으로 아내를 데려왔다. 그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채,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동침하지 않았다고 마태는 증언한다. 인생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직면할 수도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요셉처럼 기도해야하며, 하나님의 방향을 따라야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이다.
율법으로 보면, 약혼녀가 동침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으니 바람핀 죄로 사형에 처해야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으로 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할 자가 탄생한 것이다. 인생사,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직면하면, 마태복음 1장의 요셉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율법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랑으로 포용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아버지 요셉의 관용과 어머니 마리아의 은밀한 사연이 중첩되었다. 어떤 사연의 아이라도 훗날 어찌 될지 누구도 모른다. 족보와 부모로 자녀를 판단하기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측량할 수 없다. 마태복음 1장을 통해 자녀교육에 더욱 힘쓰는 부모들이 되어야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관용과 포용의 인내를 가져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