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은 한 개인에게 독점될 수 없다.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세례(洗禮)는 씻음의 예식이며, 죄사함의 예식이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보여지는 현상으로는 로켓이 우주로 발사하는 것과 같지만, 영적 현상으로 구름에 가리워진 것이다. 육과 영의 차단막이 생긴 것이며, 더 이상 보이지 않으므로 육체를 가진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에 몰입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가 중요한 묵시다.
스스로 돌아봐야한다. 말씀을 가까이하는가? 그러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깊게 생각하는가?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충분히 점검할 수 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의 대강림은 언젠가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날마다 각 사람에게 임재하는 성령의 역사다. ‘하늘로 가심’이 sky가 아닌 heaven일 때, 날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영적 축복이다. 사도들이 부활의 예수가 떠났음에도 흩어지지 않았던 것은 성령의 불이 있어서다. 단체의 결속력은 곧 성령의 역사덕분이다. 성령이 없으면, 목숨을 내걸고 순교의 피를 흘릴 수가 없다. 열정(熱情)은 곧 불이요, 성령이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교회조직을 정비하는 모습이 나온다. 말씀에 묶인 삶을 살게 된 베드로는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직면한다. 폭풍이 치는 갈릴리 바다로 배를 띄우듯 그러했다. 가룟유다의 최후를 성경으로 해석해서 처리하고, 맛디아를 선출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했다. 교회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말씀에 의지해서 성도의 마음을 추스르면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성직자의 직분이다.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예수의 동행’이다. 하늘로 올라간 그 예수가 영원한 결별로 가리워졌다면, 사도행전이 무의미할 것이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함인데,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간 그 예수가 사도들을 통해서 함께 행하신 내용들이다. 즉,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이 실현되고, 성령이 임재한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거나 무감각하면, 인본주의가 된다.
우리는 ‘대강림’을 기다리면서 ‘성령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보면, 성령과 함께 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성령이 선물로 각 사람에게 임재한다고 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각 사람에게 핸드폰을 주는 것과 동일하다. 성령은 공중전화가 아니다. 성령은 개인 핸드폰이며, 누구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 성령은 한 개인의 독점체제가 아닌 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사도행전 1:5
오직 성령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인류에게 주어진 거룩한 세례인 것이다. 누구나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면, 그 성령이 임하여 영적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의 세례가 곧 죄사함이며, 구원이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돈과 권력과 명예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람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간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 성령이 함께 하는지, 아닌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성령은 삶의 인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