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만 장편소설 ‘요셉과 그 형제들’(장지연 옮김)을 읽고 있다. 창세기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은 단연 야곱이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이어진다. 북이스라엘은 사라졌으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야곱의 아들 유다도 ‘유대교’로서 이어진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유다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야곱은 엄마의 품에서 양육된 마마보이였으나,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은 후, 혈혈단신 데릴사위로 일하면서 경제축복과 사랑축복을 받았으나, 훗날 패가망신해서 자식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이민을 간 인물이다.
보통 사람들은 야곱이 축복기도를 받고, 삼촌 라반밑에서 21년을 있는 동안 거부가 되어서 돌아온 것만 부각시킨다. 야곱은 요셉이 사라진 이후, 점점점 가세가 기울었다. 반면, 요셉이 있던 이집트는 점점점 잘되었다. 창세기는 야곱과 요셉이 겹치는 중심인물 노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요셉에게 있음을 증언한다. 도대체 왜 이런 복잡한 일이 일어났을까?
창세기는 ‘떠남과 분리’의 역사다. 아브라함은 갈대아를 떠나서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다. 이삭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 아내의 사랑으로 이동한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에서 양육되었는데, 축복기도를 받은 후에 형 에서의 미움을 받고 거의 추방당했다. 축복기도를 받았기 때문에 추방당했다고 해석하기도 그렇고, 축복기도를 받아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잘되었다고 하기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축복기도는 하나의 상징성이다. 진정한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사상을 물려받는 것이다. 요셉은 축복기도를 받지 않았어도, 혈혈단신 이집트에 가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국무총리가 되었다. 야곱이 물려받은 하나님 사상이 요셉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이다. 이것이 축복기도다.
야곱은 금의환향했다. 형 에서의 미움을 받고 외가집으로 도망갔으나, 21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거부가 되었으니 형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실종’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 사라질 경우, 이와 같다. 야곱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인데도 그러했다. 많은 자녀들이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우상숭배 국가 이집트가 왜 잘되었을까? 야곱이 있는 곳은 점점점 가뭄이 들고, 우상숭배 국가 이집트는 점점점 풍요로울까? 창세기를 깊게 읽으면 하나님의 섭리가 새롭게 보인다. 대충 보면 대충 읽힌다. 잘되는 데는 잘되는 이유가 있고, 안되는 곳은 안되는 이유가 있다. 요셉이 있어서 이집트가 잘되었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야곱이 있는 곳은 왜 안되었을까? 여기에 형제들의 범죄사건이 존재한다.
모든 형제들이 결탁해서, 아버지를 속이면서 ‘요셉의 죽음’을 덮었다. 죽지 않은 요셉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노예로 팔았으니, 증오로 얼룩진 그 범죄가 야곱의 가문을 점점점 기울게 한 것이다. 만약,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시나리오를 누가 알겠는가.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요셉도 떠남과 분리의 노정을 갔을 것이다. 그 장소가 이집트일지, 다른 곳일지, 누가 알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신본주의 사상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멀리 보내고, 이삭에게 가업을 물려줬다. 이삭을 제외하고 야곱과 요셉은 가업을 직접 물려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상으로 혈혈단신 창조의 역사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