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칼럼은 독자의 요청에 따라 약간 수정해서 올립니다.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제자들은 멘붕에 빠졌다. 부활하신 후에도 혼동은 지속됐다. 제자들이 의기투합한 것은 40일 부활기간이 끝난 이후다. 40일은 아주 긴 기간이다. 그렇게 40년이 지났고, 예루살렘이 무너지면서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혼돈의 연속이었고,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나침반을 삼고 살아갔다.
지금 우리는 구약보다 신약이 더 익숙하지만, 예수님은 신약이 없었다. 구약을 통해서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구약 성경을 좋아하도록 생활교육을 시키셨다. 예수님이 계셨을 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요한복음 1장에 정의된 ‘말씀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방향이었다. 말씀대로 살면, 말씀이 하나님이므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교리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온다. 교리와 진리를 다르게 생각하면 안된다. 교리는 가르치는 진리(眞理)다. 교회(敎會)는 교회(交會)가 아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는 공동체 모임이다. 신앙(信仰)은 믿음이 핵심이다. 믿을 신(信)은 사람과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도와 성도의 믿음이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다. 가족을 확대하면, 국가가 되고, 종교적으로는 교회가 된다. 가족에서 부부끼리 싸우면 집안이 바로 서지 못한다. 그처럼 성도들끼리 불신이 커지고, 교회제도가 통제가 심하면 성도는 마음이 멀어지게 된다. 신앙의 본질은 곧 ‘믿음’인데, 성도끼리 믿고 대화를 나누는 소모임의 중요성이 여기서 비롯된다.
나는 기독교***** 소속이다. 요즘 다른 교단의 예배를 취재했다. 솔직히, 내가 속한 교회가 많이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문화에 있어서, 혁신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단들은 매우 앞서 간다. 평신도들이 예배가 끝나고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야하는데, 내가 속한 기독교*****는 역부족이다. 부서 모임 공지가 대부분이다. 달라져야한다.
내가 만약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다면, 그 누가 내게 영적 양식을 주려나? 모두 진리의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 영혼의 감흥이 깊을 것인데, 내게 감동의 조각을 전해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가 누군가. 거의 없고, 몇몇이다. 내가 소속된 교회는 아직 없다. 이런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나는 영성으로 깨어나길 간절히 소망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초기 신앙공동체로 돌아가야한다. 말씀을 중심하고, 말씀을 강론하고, 기도에 힘쓰면서, 다양한 사역을 만들어서 교회운영에 동참하는 것, 그 시작점은 교역자를 통해서 가능하다. 토요일에 성전청소가 있다면, 교역자부터 모범을 보여야한다.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주일날 그러한 사역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면서 생기를 넣어줘야한다.
교회마다 나같은 부류가 적지 않다. 마땅한 포지션이 없는 부류다. 포지션이 없는 이유는 교회조직이 경직되어서 그렇다. 기쁜소식선교회를 방문한 다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곳은 조직이 살아있다. 평신도가 세포라고 하면, 모든 세포마다 미토콘드리아가 살아있듯이 그렇게 생기가 넘쳤다. 그 원동력이 도대체 어디서 출발할까? 그곳은 내가 다른 교회에 다닌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교회예배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20년전, 나는 한심하게 살았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빈천(貧賤)하게 살았다. 어느날, 내게 손을 내민 소중한 손길이 있었고, 나를 사람으로 대우해준 그 따뜻함에 나는 영적으로 벌거벗음을 진정 깨달았다. 할수만 있다면 나의 수치를 변명의 무화과 잎사귀로 가리고 싶었다. 하나님은 나의 수치를 사랑의 가죽옷으로 가려주셨다. 그리고 나는 언론인의 길을 걸어왔다.
사람들은 나의 재능이 부럽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떨어진 그 절벽에서 떨어져야한다. 내가 처한 그 빈궁에서 견뎌야한다. 무엇이든 공짜는 없다. 자유가 그러하듯. 20년전, 내게 손을 내밀었던 그 손길은 진정 누구의 마음이었을까? 최소한 교역자는 아니다. 내가 겪었던 지난 20년의 인고를 함께 살아낸 그리스도의 성품일 것이다.
내게는 기독교*****가 하나의 제도일뿐이다. 제도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주일날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아니란 말인가? 성경해석의 오류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은 내게 그러하시다. 혹은, 성령 어머니의 마음으로 내게 말씀의 양식을 공여해주는 사랑의 향기를 가지던지…..
나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파악한다. 침묵으로 반응하지 않는 죽은 나무토막들이여!! 살아나소서!! 비판의 소경들이여!! 편견의 안경을 벗으소서. 은혜가 메말라 죽어가는 성도들의 심령을 제발 돌아보소서!! 말씀이 진리라고 진실로 믿는다면, 그 말씀의 강물이 성도의 심령에 흘러가도록 제도를 정비하소서!! 그러면, 밑빠진 독에 은혜의 물이 차오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