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타적 종교관과 포용력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중년을 살다보니, 경험이 나를 조약돌로 만든다. 뾰족한 모서리처럼 비판의 칼을 세웠던 사건과 사람도 품어 보려고 고민한다. 그 입장을 헤아리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믿음이 확고부동한 종교진리를 믿고있는 내게 가끔 종교가 다른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머뭇머뭇해진다. 불교행사가 있으면, 취재를 해야하나. 어쩌나. 세계일보 신문을 사볼까. 말까. 김밥천국에서 김밥을 사서 먹을까. 말까. 교리와 다른 종교에서 만든 제품을 쓰면 그게 범죄인가. 이슬람 상품이 점점 밀려오는 요즘,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류가 많을 것 같다.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나는 답을 모르겠다.
노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가끔 절에 가서 설법을 들으셨다. 노원에 유명한 절이 있는데, 그 스님을 뵈러 가서 인생 상담도 하고, 덕담도 들으면서 정답게 보내셨다. 가족안에 종교가 달라도 서로 즐겁게 살듯이 그렇게 하셨다.
어느날 할머니가 절에 나타나지 않았다. 스님은 무슨 일인지 도통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밑에 스님을 보내서 알아봤다. 파견받은 스님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니,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스님이 할머니에게 “혹시 원하시는 것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할머니 왈, “몇주동안 주일예배에 가지 못했는데, 말씀을 못 들으니 마음이 허전해서… 스님께서 들어줄 수 있남?”
그 스님이 절에 돌아가서 자초지종을 전하니, 큰 스님은 깊은 번뇌에 빠졌다. 또한, 인심이 좋은 그 할머니의 종교가 기독교였는데, 꾸준히 절에 와서 스님을 허물없이 대해준 것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면서, 아파서 누워있는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줄 방도를 찾아야겠는데,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일날, 큰 스님이 승복을 입고, 그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설교말씀을 받아적어서, 할머니를 방문해서 전해줬다. 그렇게 한달을 했더니, 교회에서는 당회를 열어서 심각한 논의까지 진행했다. 승복을 입은 승려가 예배에 참석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는 논의였다. 결국, 설교가 끝나고 큰 스님과 교회 담임목사님이 만났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큰 스님이 할머니의 사연을 말해준 것이다. 그제서야, 큰 스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 교회는 한편으로 안도, 한편으로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교회가 챙겨야할 잃어버린 생명을 불교에서 챙겼으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노원구에서 꽤 큰 교회와 꽤 큰 절은 요즘도 초파일과 성탄절에 서로 문화교류를 하는 연례행사를 개최한다. 초파일에는 교회 목사님과 중직자들이 절에 가서 행사를 참관하고, 성탄절에는 절에 계신 스님들이 교회에서 함께 성탄을 축하한다. 노원구에만 있는 이색적인 종교화합은 어떤 할머니의 사연으로 시작된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평화와 사랑의 참모습,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포용은 나와 다른 그 무엇을 품기 위해서 내것을 죽임으로 순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금식이요, 할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