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전화번호는 없다. 유일한 전화번호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외에 우리가 무엇을 믿으랴!!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과 연결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노예제도와 기독교 역사’에 대해 깊은 강론을 전해주셨다. 아!! 그 감동!!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복음의 자유를 주심이 무엇인지, 나는 그때 근본으로 알게 됐고, 구원이 무엇으로 말미암는지 아주 조금 체휼했다. 늪에 빠진 인생에게 구원이 매우 간절함은 ‘채무면제’처럼 그러하다. 족쇄가 발목에 갇힌 자는 새장의 새처럼 날 수가 없다. 자유가 박탈당한 자는 꿈이 묶인 자요, 희망의 날개짓은 허망한 발버둥일 뿐이다.
오늘날 노예제도는 없어졌으나, 종교를 빙자한 영혼의 노예제도가 있다. 이런 종교는 성경해석의 교리를 가지고, 사람의 얼을 빼버리고,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없도록 만들며, 하나님을 믿는 양심을 박탈하고, 신앙의 자유를 없애면서 개성을 말살한다. 종교에 속박당한 사람들은 자신이 노예인줄 전혀 모르는 노예이다.
구원이 진정 무엇인가? A종교, B종교, C종교는 각각 구원의 내세가 다르다. a교단, b교단, c교단은 각각 구원의 형체가 다르다. 모든 종교와 교단은 서로의 종교가 옳다면서 상대는 틀렸다고 한다. 모든 종교가 옳다고 가정하면, 종교는 틀리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성경중심의 신앙이 매우 중요하다. 구원은 성경을 중심한 근본 말씀을 통해 가능하다.
성경의 깊은 비밀을 풀고, 세계 정상들과 교류하며, 세계의 헐벗은 백성들에게 구제사업을 하면서 세계적 단체로 인정받는 T종교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을 없애 버렸다. 자체 성경을 사용하면서, 창시자는 독생자가 되고 배우자는 독생녀가 되었다. 과연, 그들이 구원주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구원주가 되거나, 부분적으로 정치적 구원주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통한 영혼의 구원주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을 근본으로 부정하면, 신약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약을 부정하면, 새로운 역사도 부정된다. 예수님을 근본으로 인정해야 새로운 역사도 인정된다. 예수님을 부정하면, 예수님처럼 죽음의 십자가 사건을 치러야하는데, 그 또한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없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인정하면서 선교역사를 이뤘던 것이다.
성경을 벗어나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쓸 제도와 인식관에 예속되면 두려움이 철조망을 친다. 그것이 영적 노예제도다. 그러한 교리가 강한 종교일수록 자유가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아들이 될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구원이다. T종교가 그러한데, 하물며 어떤 종교랴!! 노예는 노예문서로 운명의 굴레를 씌운다.
종교가 구원의 교리로 자유를 구속하면, 그것은 영적 감옥이다. 진리를 빙자해서 표현을 억압하면 그것은 비진리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다. 소금은 짜다. 그렇듯 진리는 자유를 선물로 준다.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진리에서 거리가 먼 것이다. 종교마다 특색이 있지만, 계급주의를 교리로 삼는 종교는 노예제도를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설교에서는 종에 대해 거론했어도, 본질적으로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