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마녀사냥은 섬뜻하고 무섭다.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정적이 제거될 수도 있다. 마녀사냥으로 지목되었을 때, 정말 마녀인지 아닌지 어떻게 분별할까. 지혜자와 사기꾼은 어떻게 분별할까. 분별력에 대해 언젠가 설교말씀을 들었다. 아!! 그렇구나. 마음이 수긍했다.
성경은 예수가 육체로 온 것을 부인하는 자를 적그리스도(이단)으로 봤다. 예수님이 구원주임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이 육체로 행하심을 부인하는 것. 그가 이단이요, 적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님인데, 부활의 주님이 승천하고서 수많은 선지자, 예언가, 교사들이 출현해서 “예수님의 영적 임재”를 설파한 것이다. 그 말을 들어보면, 그냥 쏠린다. 과연 어떻게 분별해야하나?
[요한1서 4장]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설교를 하셨던 목사님은 영적 분별법에 대해 “말과 행위의 일체, 육체로 행함이 진정 중요하다”고 말씀했다. 상당히 보편적이고, 상식에 해당되는데, 왜 우리는 그 분별력을 상실한 영적 봉사가 되었을까. 둔갑술때문이다.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변장술은 문화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지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문학으로 다가와, 진리를 훼파한다. 자유의 이름으로 찾아드는 온갖 학설은 결국 영적 자유를 침탈한다. 곧 신앙이 실종된다.
창세기의 선악과를 여자의 생식기로 풀이하는 성경해석을 배운 적이 있다. 비유의 해석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독버섯처럼. 지금은 그 해석을 여러 해석의 하나로 생각한다. 실존의 아담과 하와가 아니고서, 누가 그 사건을 알랴. 더불어 이미 끝난 구약사건이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랴.
직업으로 교사는 가르치는 기법이 가장 중요하다. 반면, 종교인으로 교사는 행위가 곧 말씀이다. 행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각종 학설을 동원해서 역사를 증명하면,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 육체로 임한다는 의미는 곧 행위로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의미가 “이성관계를 하지 말라,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라고 풀었다면, 그것을 가장 먼저 실천하면서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쳐야한다. 그래야 참된 선지자요, 교사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선악과 사건을 이성관계로 해석하는 성경풀이는 그 폐단이 너무 많다. 그것만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의로운 사람이 되고, 그것을 했을 경우에는 숨김으로 ‘거짓의 거짓의 사람’이 되어가면서, 점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 선악과가 육체의 그것만을 의미하겠는가?
성경의 깊은 인봉을 풀이하면서, 그 행위는 정반대로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결코 없다. 그 행위가 곧 말씀이다. 언론인에게는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이 있다. 정보의 생명력은 ‘사실’(팩트)에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 확인했는가. 그것이 기자의 생명력이다. 그와 같이, 종교인은 말씀을 전함과 그 말씀을 행함으로 영적 생명력을 유지한다.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다. 성경은 누구나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듯이, 범죄는 독약이다. 독약을 먹으면 안된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로서, 인자는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자들은 미련한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서 준법정신이 강했다. 그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의 교육철학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말함과 행함의 일체, 그것이 말씀의 육신화다. 성경의 인봉을 지식으로 푸는 것이 결코 아니다. 행위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모사’라는 말이 있다. 한때 내가 속했던 교단은 ‘모사’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모사는 곧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 어떤 모양이라도 거짓말은 정의롭지 못하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 모른다. 스승과 제자의 신뢰가 깨지고, 진심을 담아서 하는 모든 말들이 결국 ‘모사의 가면’으로 들통날 수도 있으니, 모사는 모래성이다. 얼마나 비참한 비극인가. 그래서 나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정직과 약속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모사가 허용되면, 모든 것이 모사가 되고, 모사의 다른 말은 사기다. 모사꾼은 사기꾼이다.
성경에서 모사로 유명한 인물이 ‘야곱’이다. 야곱은 거짓말로 에서의 가면을 쓰고서 축복기도를 받고서, 외가집으로 쫓겨간 인물이다. 그곳에서 7년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삼촌이 속임수를 써서 짝을 바꿔버린다. 그래서 7년을 더 봉사해서 라헬을 얻었다. 삼촌은 봉급을 주지 않으면서 노동을 착취해서, 야곱은 엄청나게 고생했다.
야곱의 자녀들은 야곱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해서, 요셉을 팔아남기고서, 양의 피를 묻혀서 죽은 것으로 둔갑시켜 가장 추악한 거짓말을 했다. 야곱의 거짓말이 그 자녀들에게 그대로 답습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진실이다. 요셉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과 정직을 고수하면서 감옥에 갇힐지라도 정직을 버리지 않았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는 것이다. 진실이 왕따를 당하듯 구석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도, 결국 정직의 빛이 거짓의 어둠을 몰아낸다. 모사는 거짓이다. 모사는 사기다. 무슨 이유로도 허용되서는 안된다.
행위가 없는 이론가는 지적 사기꾼이다. 행위가 없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다. 이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그 행위가 어떠한가. 그 가르침이 행위로서 어떻게 입증되는가. 그것으로 분별해야한다. 김정은이 남북평화통일을 말하지만, 핵을 완전히 포기하기 전까지는 ‘핵포기’는 거짓약속에 불과하다. 약속은 그것을 이행할 때에만 신뢰를 얻는다. 이행되지 않는 모든 약속은 거짓이다. 예수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 그것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매사에 분별력은 이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계시록의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다. 2천년이 지났어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북극성은 2천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북극성이다. 새벽별의 근본자는 예수님이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지체로서 스데반,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 루터 등등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새벽별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하는 순간, 신약이 사라지므로 구약에 갇히게 된다. 구약의 감옥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어찌 벗어나리요. 십자가 사건이 구약의 감옥을 열게 된 열쇠였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다.
[마태복음 7장]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중략)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5장]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