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떤 목사님이 “진리는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고 정의했다. ‘보수와 진보’의 정반합 이론이다. 나는 수긍했다.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고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은 진리다.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적 진리다. 여기서 기독교는 ‘천주교+기독교’이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고, 유일한 중보자로 믿는 종교를 기독교라고 하며, 동방정교회도 넓은 범주에서 기독교에 해당된다.
‘이단 판별법’은 무엇일까? 판별식 D는 중근, 허근, 실근의 개수를 판별한다. 근의 공식을 쓰지 않고서도 판별식 D는 근의 개수를 안다. 그처럼 사람을 판별하는 법, 종교를 판별하는 법이 무엇일까? 그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예수님이 왜 구원주일까? 여기서 출발해야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구원주라고 했으니까, 구원주인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구원주라고 증명해서 구원주인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근본은 전혀 다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구원주인가? 전혀 아니다. 왜 예수님은 구원주인가? 왜 아담은 구원주가 아닌가?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시작은 아담이 했는데, 누구도 아담을 구원주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인의 형질은 누구로부터 유전되었나? 왜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였을까? 가인을 확대해서 유대교는 왜 예수님을 죽였을까? 예수님은 왜 아벨처럼 그저 죽었을까?
[마태복음 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집단으로 오시지 않고, 각 개인에게 오셨습니다. 매국노였던 삭개오에게, 간음하다 붙잡힌 창녀에게, 부자 청년에게 오셨습니다. 계급과 상관없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 어떤 목사님 설교내용 요약본
‘마태복음 1:21’에 기록된 ‘자기백성’에 내 영혼과 마음과 육체가 포함되길 나는 진심으로 간구하였다.
성경해석은 다양하다. 그 해석보다 위에 있는 것이 바로 행위의 말씀이다. 해석은 말이다. 말은 누구나 하고, 인용과 도용이 가능하다. 이론을 따질 때는 이론의 출처를 통해서 사실관계를 파악한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인지 판별법은 ‘진리의 행함’으로 구분한다. 요한복음 1장(말씀의 육신화)과 요한1서 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한복음 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중략)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1서 4장]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예수님이 구원주이신 것은 실제로 말씀을 행해서 그렇다. 십자가를 직접 지셨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사셨고, ‘돈의 유혹과 권력의 압제’에도 말씀을 외침으로 행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예수님이 걸어갔던 그 길을 걸어갔다. 이것이 절대불변의 진리다. 행위와 말씀이 절대로 일체되어야 그것이 진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은 곧 말씀을 실제로 행함을 뜻한다. 말만 하고, 행위는 다르게 하면 그것이 거짓이며, 거짓 선지자이고, 거짓 교사다. 사기꾼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이 그 당시 백성들에게 거짓 선지자요, 거짓 교사였다. 율법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가르쳤으나, 백성의 죄에서 구원하지 못하였다.
예언의 검증은 그 성취로 확인하고, 사명의 검증은 그 인격으로 확인한다. 이것이 믿을 신(信)이다. 믿음은 곧 사람과 말씀의 합성이다. 사람이 말을 하고, 말한 것을 지키느냐로 신뢰를 판별했다. 사람과 말씀이 붙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처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말의 많음, 말의 잘함은 논리에 불과하다. 말의 신뢰는 그 행함으로 증명된다. 약속 지킴은 곧 말씀의 생활화를 뜻한다. 나는 평생 이 판별법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