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우리는 예수님의 3대 시험을 ‘수능시험’으로 착각한다. 마태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3대 시험은 3년동안 동시에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마귀의 3대 시험에 대해 예수님이 생활속에서 어떻게 행하셨는지 자세히 알아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사형을 당했으나, 부활하였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죽음의 숙명앞에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부활이 있을 것이다. 아멘!!
1. 경제문제 : 백성
2. 종교문제 : 종교인
3. 권력문제 : 정치인
계층을 구분하면, 3대 시험은 3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문제는 백성들에 주로 해당되고, 경제문제다. 현대인에게는 직장문제다. 두 번째 문제는 종교인에게 해당된다. 성전꼭대기에 예수님을 올려놓고 시험문제를 낸 것이 핵심 포인트다. 세 번째는 권력문제로서 정치인에게 해당된다. 직업으로 분류한 것이지만, 모든 인생은 3가지 문제에 속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1. 경제문제 : 백성
시험문제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답안지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오병이어가 여기에 해당된다.
[마태복음 14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5천명이면 엄청난 숫자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5천명이니, 금융전문가 마태의 셈법을 존중한다면 백성들이 야구장에 몰리듯 몰린 것이다. 여론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었다. 그런데, 배가 몹시 고프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으니, 오병이어밖에 없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더니 어떤 과부에게 떡 한움큼이 있었듯이…. 예수님은 “그것밖에 없냐!!”고 호통을 치지 않고, 그것을 감사히 여기시면서 축사를 하고서 말씀을 전하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돈에 대한 우리의 철학은 반드시 이러해야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돌을 떡으로 만들 요행은 과감히 버리고,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신앙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감사가 끊이질 않는다. 돈으로 사람을 잡으면, 돈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진다. 사람은 말씀으로 잡아야한다.
2. 종교문제 : 종교인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험문제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답안지 :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성전 꼭대기는 교회를 뜻한다. 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시험문제다. 답은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진다. 종교인의 사명을 가진 자들은 십자가 사건이 답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마태복음 27장]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성전꼭대기를 의미한다. 그곳에서 각종 조롱을 받았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묵묵히 감당하셨다. 종교인들이 가져야할 책임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묵묵히 견디신 것이다. 제사장들이 제사장이라면,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베옷을 입어야한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의 옷을 입고서 백성을 통제한다.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서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는데, 하물며 제사장이랴. 예수님은 인류의 대제사장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셨고,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종교인으로서 베드로와 사도바울과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순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루터도 교황과 대항해서 ‘구원의 절벽’에 떠밀려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믿음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믿음을 지킨다는 것이다.
3. 권력문제 : 정치인
권력문제는 헤롯이나 빌라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기에 걸려서 허우적댔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정답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라’이다. 그 외에 답이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음으로 형제들끼리 사랑으로 섬기도록” 했다. 섬기는 자가 더 높다는 말씀으로 권력문제를 해결했다.
[마태복음 20장]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권력문제가 종교에 침입하면, 그 종교는 무너진다. 권력이 침입한 종교는 ‘과잉 충성파’가 형성된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엎드려 경배하면’이 바로 과잉 충성파다. 절대 충성은 모든 단체를 변질시킨다. 특히 교회와 교단이 절대충성파로 이뤄지면, 말씀과 신성이 사라지므로 멸망이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과잉 충성파는 마귀의 족속이다. 예수님의 3대 시험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섬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지, 사람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되는 순간, 마귀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과잉 충성파는 인본주의요, 말씀 중심은 신본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