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지옥에 떨어질 두려움에 밀려난 적이 있는가? 지도자만 배신의 단어를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르는 자도 지도자를 향해 ‘배신’의 단어를 쓸 수 있다. 충성자는 간언(諫言)의 순교를 다함으로 왕의 길을 바로 잡고, 죽임을 당하거나, 귀향을 가게 되면 ‘배신의 쓴 잔’을 마셔야한다. 배신(背信)에서 신(信)은 믿을 신이지, 몸 신이 아니다. 배신은 사람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신념을 배신하는 것이다. 신념, 신앙, 신의를 등지는 것이 곧 배신(背信)이다.
信은 무엇인가? 사람과 말씀의 합성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길,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그 말씀은 ‘로고스’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말씀과 사람이 합쳐진 것은 말씀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그가 믿을 신(信)이다.
영화 말콤X를 본 적이 있다. 말콤X는 종교 지도자가 자신이 세운 법(法)을 배반함으로, 그 따르는 자가 새로운 길로 출발하는 내용이다. 종교 지도자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 말씀에서 벗어난 길을 간다면, 그것이 배신의 길이다. 배신은 지도자에게 등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배신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조폭의 세계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말씀을 벗어나면, 그것이 배신(背信)이다. 기준이 곧 말씀이요,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황이 말씀과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그때 루터가 교황에게 진심을 담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95개조 반박문이다. 루터가 교황을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철회하지 않자,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단은 구원박탈과 지옥행을 뜻한다. 아!! 그 두려움과 떨림이여!! 누가 배신자인가? 루터? 교황?
10년 전이다. 종로에 있던 어떤 교회에서 여자 목사가 새벽예배에서 “내가 조건기도를 세워서 000의 목을 쳤다. 그때 목을 치지 못했으면, 큰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섭리를 위해 정말로 큰 일을 했다”라고 자랑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속으로 “살인자”라고 판단했다. 본인 입으로 사람의 영혼을 저주해서 죽였다고 했으니, ‘영적 살인자’이다. 저주의 주술신앙이 얼마나 무섭고 섬뜻한지….. 무당보다 저급한 기도의 주문이여!! 나는 지금도 그 여자 목사의 말이 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형제를 새벽마다 저주해서 그 형제가 섭리를 떠나게 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공적이라고 하니, 유대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서 스스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고함과 무엇이 다른가. 저주의 칼춤에 그래서 나도 서서히 죽어가서, 결국 추방당한 것인가?
나는 심령이 죽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구원과 휴거를 이뤘다는 권태속에서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더니, 구원이 박탈당한 그 두려움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했다. 저주의 주술신앙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미운 물건이다. 나는 확신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언제부터 ‘형제를 저주하여 죽이라’고 둔갑했던가. 차라리 구약법이 더 낫겠다. 예수님은 ‘원수사랑의 법’을 결코 폐하지 않으셨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