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천고 40회, 국민대 49회, 해병대 697기다. 순천고 출신으로 네이버 인물검색이 되고, 언론사 대표로서 명성을 얻은 인물은 몇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그렇고, 나는 동창회와 동문회를 가지 않는다. 술문화가 싫고, 풍습이 달라서 그렇다. 내 삶이 사회적 평판으로 비교하면, 현저히 바닥인 것들도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부족을 놓고 애통한 적이 있다. 그때, 동창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술에 취해 정처없이 방황하면서 향락의 늪에서 춤추는 그들의 문화를 보면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깊게 감사했다. 오늘도 나는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이것이 내 인생의 자부심이다.
인생은 100년 남짓 살아간다. 그래서 고향친구와 동창이 있다. 20년, 40년, 60년의 기간을 두고서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다. 요셉은 성공한 이후에 형제들과 다시 만나면서, 극적인 상봉을 했다. 반면, 야곱은 삼촌의 직장에서 너무 고생을 했다. 임금착취는 자녀로 보상될 문제가 아니다. 양육비가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21년 직장생활에 퇴직금도 없는 목축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퇴직금이었다. 14년은 사랑을 위해서, 7년은 경제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직장생활을 했더니, 성공한 목축업자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영광을 얻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그 시점은 신앙인이 동창회에 가는 것과 흡사하다. 양떼를 앞에 내세우면서 에서를 만났던 그 순간, 엣날 친구들과 비교할 것들이다.
그러나, 결국 야곱은 점점점 가세가 기울면서 극심한 가뭄으로 모든 것을 잃고서 이집트로 이민을 가야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은 노년의 시대에 에서를 다시 만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보여지는 것들은 비교의 기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30년, 나는 행복한 가정을 원했으나, 사랑에 실패했다. 구원의 길을 따랐으나, 족쇄는 점점점 내 삶을 구속했다. 2달전,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던 그 때에, 나는 내 방에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다. 1999년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하나님을 불렀다. 그랬더니, 다음날 하나님이 응답했고,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길로 가게 되었다. 방향과 속도다.
나는 지난 30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야곱이 이삭의 재산을 상속받은 것이 아니다. 야곱은 21년 삼촌의 집에서 ‘마르크스의 노동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착취의 설움을 견뎌야했다. 아브라함은 떠돌이 나그네처럼 가나안을 배회한 것 같았으나, 하나님이 지시한 곳이니 그곳이 축복의 땅이었다. 요셉에게는 이집트가 하나님이 지시한 땅이었고, 예수님께는 십자가 위가 하나님이 지시한 위치고, 사도 바울에게는 유럽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이었다.
각 인생마다 하나님이 지시한 땅이 각각 다르다. 30년 전에 나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신앙의 거주지를 옮겼고, 또한 지금도 말씀을 따라서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결정했다. 신앙의 주소지를 옮겼다. 내가 신뢰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1999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