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내 옷 외투 브랜드는 트레몰로다. 바우 하우스에서 구입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 시점은 4년 전인가? 벌써 4년째 내 몸을 보호하는 트레몰로, 오늘 세탁소에 맡겼더니, 세탁소 사장님이 브랜드를 꼭 짚어서 “트레몰로 브랜드를 여기서 만나다니, 이 뜻 아세요?”라고 한다. ‘뜻’의 단어가 내 마음을 끈다. “뭐죠?”라고 내가 대화를 시작했다.
연주기법이라고 해서, 무슨 연주기법이냐고 차근차근 물었더니, 가장 어려운 연주기법이라고 한다. 피아노의 흰 건반을 두 손가락으로 따라라라라라 선율을 내면서 연주하는 기법인데, 누구도 할 수 없는 기법이란다. 기타도 마찬가지다. 그 이야기를 하는 세탁소 사장님의 어투에서 ‘진정성과 깊이’가 느껴졌다. 트레몰로를 내가 입고 있었다니…..
등잔밑이 어둡다고, 내가 이미 입고 있는 트레몰로의 뜻도 모르고 있었다니…. 우리는 이러한 엇박자를 살 때가 많다. 트레몰로는 “떨림”의 의미로서, 본질을 추구하는 음악의 예술이다. 알함브라의 궁전에 나오는 그 선율의 떨림이다. 얼마나 아름답던가?
나는 생각한다. 생각지도 않게 나를 빨간불 신호등처럼 붙잡고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이미 입고 있던 외투의 브랜드 뜻을 새삼 깨닫게 하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가죽옷을 입히셨다고 하더니, 그 가죽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라고 해석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씀하시나…. 그렇다면, 아멘!!
“왜 트레몰로 연주기법이 어렵죠?”라고 물으니, “부드럽게 다루는 것이 쉽지 않죠”라고 설명한다. 나는 기타연주를 할 줄 모른다. 트레몰로 기법은 소금으로 맛을 내는 마지막 단계와 같고, 그림으로 비유하면 가장 마지막 단계를 뜻한다. 정교한 색채를 입히는 것이 가장 어렵다. 기사를 쓸 때, 현장 스케치가 가장 힘들다. 그러한 기법이 트레몰로와 같다.
생명을 다루는 성직자의 마음가짐도 ‘트레몰로 연주법’과 같아야한다. 아무렇게나 툭툭툭 인간적 생각으로 대하면 안된다. 인간적 감정으로 성도를 대하는 것은 ‘피크’로 연주하듯 매끄럽지 못하다. 생명의 마음은 고래심줄처럼 예민하고, 신비롭다. 조심과 긴장과 떨림과 순결로서 생명의 마음을 다룬다면, 감동의 선율이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나름 혼자 생각해 봤다.
나는 기억과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슬픔으로 나는 많이 견뎌냈다. 너무 괴로울 때, 나는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그 덕분에 나는 가끔 돌발행동을 하고, 파격적인 방향전환을 한다. 사도바울도 기도함으로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쪽으로 방향전환을 했듯이, 나도 내 인생에서 가끔 기도하고서 유턴할 때가 있다. 유턴을 해야겠다고 신호가 오면, 나는 그 무엇도 고려하지 않고, 유턴을 한다.
30년전 고등학교 2학년때 그렇게 했고, 대학교때 해병대 입대할 때도 그렇게 했고, 1999년 세상문화에 빠져서 살던 내게 구원의 손길이 왔을 때도 그러했고, 이혼할 때도 그러했고, 얼마전 루비콘강을 건너듯 교회를 옮길 때도 그러했다. 물고기는 물이 생명이듯, 포유동물은 공기가 생명이듯, 인생앞에는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다. 왜 나는 기존 교회에서 트레몰로와 같은 연주기법을 듣지 못했을까? 감동의 아름다운 선율을 왜 듣지 못하였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요즘은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30년전 그 설레임이 내게 밀려온다. 아!! 수혈을 받거나 인공호흡을 받는 구급차의 응급치료인가?
물론, 교회를 옮겼다고 해서 내 기억이 송두리째 건너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교를 전학하면, 진정한 친구관계가 정리된다. 그처럼, 교회를 옮기니까 그동안 기계적 형식관계로 맺어온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다. 섭리를 떠난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처분한다고 하지만, 나는 책상에 여전히 있다. 그 사진이 싫지 않아서다. 내 인식관에서 나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혼의 절망속에 있엇을 때 나를 도와준 그 편지가 내 마음에 애잔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내 인생의 운명은 말씀을 따라 가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말씀은 성경의 본질이며, 구약과 신약의 모든 것(태초에서 지금까지)을 함축한 단어로서 ‘말씀’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인격적 관계와 체험과 교제와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다는 말씀처럼, 앞으로 새로운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을 친밀하게 배움으로 가까워지길 원한다. 그리하여, 나의 30년이 허망하지 않고 새롭게 승화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할 따름이다. 무덤에 갇혔던 예수님도 부활하셨는데, 내 인생의 30년도 무덤속이라면 부활의 기점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