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1장을 요약하면, 위 문장이다. 더 압축하면 ‘말씀의 육신화’이다. 이단들은 ‘사람의 신격화’를 추구하고, 하나님은 ‘말씀의 육신화’를 요청한다. 말씀이 육신이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말씀의 육신화는 도대체 무엇일까?
예수님의 탄생과정을 보자. 약혼녀가 임신했다는 유언비어가 터졌다. 그때 요셉은 인격의 용서로서 마리아의 임신사실을 덮고, 품는다. 성령이 잉태했다고 믿고서 동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인가.
예수님은 살아있는 동안에 ‘신격화’를 명령한 적이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명을 깨달았을 때도 ‘비밀’에 부쳤다. 또한, 권력투쟁이 제자들사이에 발생했을 때, 세족식을 통해서 권력욕의 불길을 껐다. 예수님 스스로 권력욕이 전혀 없었다. 권력욕이 있었다면, 섬김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에게 “너가 대신 희생해라”고 했을 것이다. 과연 이런 종교지도자가 있다면, 제자들을 희생해서 본인의 죄를 덮으려고 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없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간통죄를 덮으려고 우리아를 간접살인하듯, 죄를 덮으려고 희생양을 삼는 종교지도자는 진리에서 벗어났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적발된 여자가 붙잡혀 왔을 때, 예수님이 보여준 사랑의 인격은 2천년이 지나도록 회자된다. 말씀에서 비롯된 인격은 천년향기와 같아서 감동이 소멸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그 말씀이 실제로 보여지도록 인격적 삶을 살으셨다. 말씀의 길을 걸어가신 인격을 갖추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씀하시고, 겸손함의 자세를 항상 가지셨다. 말과 행위가 일체되어야한다고 하시면서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나는 그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싶다.
공부만 잘한다고 인격이 완성되지 않는다. 인격(人格)은 사람과 관계에서 형성된다. 인격은 성령과 관계에서 비롯된다. 공부와 인격이 별개다. 공부는 잘하면서 인격이 떨어지면, 사기꾼이 된다. 지적 사기꾼은 인격이 실종된 천재다. 종교지도자도 동일하다. 인격이 없는 인물이 종교 지도자가 되어서 말씀을 전하면 성도들이 피곤하다. 말씀은 반드시 인격으로 나타난다. 성경의 깊은 비밀을 지식으로 푼다고 해서 인격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그릇속에 말씀이 담기는 것이다. 육신의 그릇은 내면은 양심이요, 외면은 인격이다. 양심과 인격이 깨진 상태에서 말씀을 담게 되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양심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밥먹듯 하면서 말씀을 전한다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다. 양심과 인격을 반드시 갖춰야할 신앙의 필수조건이다.
얼마전이다. 누군가 나의 갑작스런 결정(교회 이동)을 심히 걱정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통일교 원리강론 이야기가 나왔다. 80%가 비슷한 교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 지금은 부담이 된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 성도는 “그건 이미 알고 있던 것인데, 이제와서 왜?”라고 응대했다. 맞다.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다. 그 성도는 “원리강론이 아무리 비슷해도, 한때두때반때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도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 성도는 영원한 복음을 확인하지 않아서인지, 얼버무렸다. 나는 확인했다. 표절의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숙명여대 쌍둥이 답안지 사건처럼 똑같다. 베낀 것을 베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양심적일 것이다. 나의 지적에 모순이 있다면, 그 댓가는 내가 받겠다. 그러나, 나의 지적이 진실하다면, 내가 속은 것에 대한 억울함이 풀려지길 바랄 뿐이다. 이런 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을 속이고서 말씀을 담을 수 없다.
말씀은 마음속에 담기는데, 그 마음이 청결해야한다. 양심(良心)은 좋은 마음을 말한다. 양심의 반대는 흑심(黑心)으로 검은 마음이다. 검은 마음에 말씀이 담기면, 말씀이 검게 변질된다. 그처럼 양심과 인격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교리로 풀어서 메시야가 된 것이 아니다. 말씀을 인격과 양심과 행위로서 살았기 때문에 독생자로서 증거를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