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오늘도 나는 교회를 향했다. 젊은 날, 내가 가장 감동있게 읽었던 전도서 1장을 목사님이 읽으셨다. 오~~ 그 뭉클함, “헛되고 헛되다”는 내용으로 진행되는 솔로몬의 독백이 단상에서 흘러나왔고, 목사님이 “우울증 환자의 비관론적 서술”이라고 표현했을 때, 나는 휘청했다. 듣고보니, ‘아멘’이었다. 왜 몰랐을까? 왜 나는 전도서를 우울증과 연결해서 이해하지 못했을까? 새것이 없다는 허탄함의 독백은 권태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명백한 사실앞에, 목사님은 “새 것은 해 위에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와야 새로운 것이 시작됩니다”라고 성탄절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드라마가 재밌는 것은 반전의 반전 때문이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내 생각을 뒤흔들 때, 나는 드라마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말씀으로 말씀을 해석하면서 성경의 심해를 보여주는 주일 설교 말씀은 보물섬을 향해 떠나는 모험같다. 요한복음과 전도서를 수평선으로 설정하고, 성도들을 향해 파도가 밀려오듯, 그렇게 감동이 출렁거린다. 사람은 하나님이 되길 원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그 위대한 선언앞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신비롭게 느껴졌다.
나는 ‘드라마 빈지 와칭’맨이다.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 주말 드라마를 방송사마다 찾아서 보고, 다운해서 꼭 본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요즘 인기다. 주인공 현빈(유진우)이 증강현실 게임을 하다가 박훈(차형석)을 게임에서 죽였다. 그런데, 실제로 차형석이 죽고 말았다. 그러더니, 죽은 차형석이 게임속 아이콘이 되어서 계속 나타난다. 망상인줄 알았는데, 실제처럼 생생하다. 1년동안 악몽에 시달리듯, 게임에 로그인을 안해도 차형석이 나타났고, 결국 게임의 차원을 높여서 레벨엎을 했더니,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늘에서 독수리가 나타나더니, 전령(傳令)의 개념으로 상황이 반전된다. 죽은 차형석이 칼을 가지고 쫓아오니, 주인공 현빈은 레벨엎해서 권총 무기를 구입하는 단계에 올라가서 물리친다는 설정도 신선하다. 지루함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된 일상이다. 드라마가 재밌는 것은 장면의 순간적 변화(5~10초) 사건의 변화적 전개, 상황의 반전 등이 변화를 주면서 흥미를 더한다. 뻔한 스토리 전개이지만, 시청자들의 시간을 뺏는 이유는 변화무쌍함 덕분이다. 드라마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성경은 곳곳에서 반전의 반전을 선언한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위대한 실화가 드라마틱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는 자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돌변하는 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앞에서 도망쳤다가 디베랴 호수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위대한 사도로 거듭났다. 모세는 나이 80에 아픈 기억이 피라미드처럼 솟은 이집트로 하나님께 다시 발령을 받았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반전의 연속인가? 예수님은 12제자를 데리고, 시민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갑자기 죽어 버렸다. 그 고요한 적막앞에 무덤속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었고, 그를 따르던 자들도 모두 무덤 자체였다. 그런데, 무덤속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이보다 극적인 연출이 어디에 있는가? 전설의 고향도 이와 같을 수 없다.
한국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는, 독일에서는 저명한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을 나는 참 좋아한다.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는 보수주의를 상징한다. 파슨스 이론은 미국에서 파선된 이론이다. 이미 끝난 구조기능주의는 니클라스 루만에 의해 유럽에서 완벽히 부활했다. 구조기능주의를 기능구조주의로 바꿈으로 살아났다. 이 사소한 첫단추의 변경으로 유럽은 ‘니클라스 루만’에 의해 새롭게 설계되었다. 중국의 사상이 공자와 맹자라면, 유럽의 현대철학은 니클라스 루만에 의해 새롭게 설계되었다. 모두가 실패했다고 한 구조기능주의의 결함을 면밀히 분석해서, 구조와 기능의 위치변동으로 새로운 구조주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준 그의 이론덕분에 ‘공동체의 존재’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이 또한 반전의 반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