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일, 드라마틱한 설교말씀을 들었다. “마태는 왜 성탄절에 유아 학살 사건을 썼을까요? 이 좋은 날에 저주받은 이야기를 왜 썼을까요?”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이다. 작가로서 펜은 독립권한이다. 쓸 것 쓰고, 뺄 것 빼는 것은 작가의 편집권한이다. 불편한 이야기는 빼야 선교에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마태는 왜 기독교인들이 불편해할 이야기를 썼을까? 마가와 요한은 탄생설화를 아애 뺐다. 마태는 왜?
구원받기 위해서 30년동안 ‘끝까지 버티기’로 몸담았던 곳은 권력구조가 매우 질서정연했다. ‘질서’의 이름으로 권력에 복종해야하는 마음의 압제와 제도의 굴레가 항상 답답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는데, 완벽한 교리에 의해 운행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왜 답답할까? 그 이유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헤롯의 유아학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사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헤롯’을 향해 비판의 손가락질을 날린다. 저속한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속이 시원하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오해한 헤롯 대왕, 그는 기독교인들의 원흉이다. 사도신경의 빌라도처럼,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려고 그런 것인가?
“우리의 왕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헤롯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 시간과 인생을 다스리는 왕은 누구입니까? 누구나, 자신의 주인은 자신이길 원합니다. 헤롯처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헤롯은 비판받아 마땅한 살인자인데, 살인자를 향해 날린 그 화살이 내 심장에 꽂혔다.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헤롯이 될 수도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 마태가 불편한 진실을 기록한 의도에 대해서,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아픈 진실이다.
가정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단의 주인은 누구인가? 진정 예수님이 왕인가? 권력욕은 모두가 넘어서야할 절대관문이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 속에 있는 작은 헤롯을 모두 없앱시다. 여러분 마음의 땅이 주님이 온전히 다스리게 합시다”
“아멘!!”
모두가 아멘으로 인정했다. 나도 그러했다. 내 인생의 여생은 내가 주인일 수 밖에 없는데, 주님은 내 삶에 들어오길 원하신다. 내 마음의 방에 들어와서 이런 저런 의견을 제시하길 원하신다. 국가 정책을 펼치듯, 주님은 내 인생의 설계도를 재설계하길 원하신다. 과연, 나는 허용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 상석(上席)을 내드릴 ‘마음 비움’의 부족을 깨닫는다.
“양을 먹이라고 했더니, 양을 잡아서 먹는다”고 목회자를 비판하던 어떤 교회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정말로 공감했다. 예수님은 섬김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목회자가 양들위에 군림한다면,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권력은 그 어떤 모양이라도 아니다. 지배와 억압의 권력은 짐승이고, 인자의 권력은 섬김과 헌신과 희생과 헌신이다.
“주님은 로마제국의 화려한 궁궐에서 대관식을 하지 않고, 저주받은 나무 십자가위에서 홀로 대관식을 하셨습니다. 죽음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그 죄에서 건져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가 우리의 왕입니다”
– 설교문 요약노트
“주님은 섬기러 오셨다. 섬기는 권력자로 오셨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깊게 와 닿던지, 예수님이 정말로 그러하심을 깨닫고, 내 마음의 운전대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검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섬김의 삶을 진실로 살아야겠다고 다짐, 다짐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