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이단(異端)은 다를 이(異)와 끝 단(端)을 쓴다. 端은 풀을 뽑은 모습으로, 풀뿌리를 의미한다. 뿌리는 나무의 근원이며, 끝맺음이다. 사람에게 근원은 조상이며, 자신의 정체성이다. 종교의 근원은 섬김의 신과 진리다. 이단(異端)은 끝이 약간 다르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이 약간 다르듯 그렇다. 그래서, 기준점인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히 알아야만, 뱀의 말이 어떻게 틀린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면, 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고,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된다.
이단이 처음부터 이단이었겠는가? 처음엔 누구나 잘한다. 출애굽을 했을 때, 유대민족은 ‘오직 하나님’을 숭배하기로 충성맹약을 하지만,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가니, 당장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그처럼 사람과 교회는 금새 변질된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권을 물려받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비젼을 제시하면서 ‘여리고성의 함락’이라는 적폐청산에 성공하지만, 금새 아이성 전투에 실패한다. 그렇게 인간과 지도부는 썩었다. 마귀는 천사의 변질이며, 이단은 진리의 변질이다. 루터 시대에는 교황이 이단이었다. 권력과 결탁한 종교이단이 ‘교황’이었다. 말씀에서 벗어나면 모두 이단이다. 진리와 비리(非理)는 오직 말씀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3대 시험을 깊게 고찰해야한다. 예수님도 권력과 돈과 사명의 시험이 있었다. 이단은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변질된 거짓 선지자들이다. 본래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들었으나, 점점점 변질되면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요, 그들이 이단의 족속이다. 그들은 반드시 ‘마지막 종착역’이 자기 자신으로 귀결된다. 성경은 마지막 종착역이 ‘주예수’인데, 그들은 반드시 ‘자신’으로 마친다. 이단은 자기중심의 우상이다.
예수님은 먹는 것보다 말씀을 중심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이렇게 한다. 말씀이 정말로 좋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말씀을 통해 양육받으면, 하나님은 사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소명은 교회를 통해서도 받고, 하나님의 직접 부르심으로 성령을 통해 감동으로 받기도 한다.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사명을 받는 것, 그것이 2번째 시험이다.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 세워지고서 ‘떨어지라’는 유혹을 받았다. 사명을 받으면, 꼭 사명을 벗어나는 유혹을 받는다. 사명이 무엇인가? 바로 ‘말씀’이다. 그런데, 사명을 받으면 능력을 행하고, 기적이 일어나므로, 말씀에서 점점점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때 정말로 위험하다. 이단들이 그렇게 점점점 변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 세워졌을 때, 저주의 십자가에 세워졌을 때, 결코 그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지명하신 위치여서 그렇다. 이것이 사명이다. 하나님이 지명하신 곳,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최초의 위치, 그곳을 지켜야한다. 종교 지도자가 명심해야할 소명의 위치다.
사명의 위치를 끝까지 지키면, 3번째 시험으로 올라간다. 사명을 완수하고, 오직 말씀을 순복하면, 군중이 따르게 된다. 10명 교회가 100명이 되고, 1천명이 되고, 1만명이 된다.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보여줬다고 했다. 권력의 산을 뜻한다. 구름처럼 많은 군중이 따르면 그곳이 권력의 산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천하만국의 영광이 보이게 된다. 내려다보는 그 자체가 이미 ‘절을 받는 경배의 대상’이 된다. 마귀가 ‘절하라’고 한 것은 종교 지도자가 그 위치에 올라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다.
종교 권력이 가장 어려운 관문이다. 따르는 자들이 많아질수록 권좌에서 내려오길 거부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릎 꿇는 것도 어렵지만, 사람이 사람의 무릎을 꿇리게 하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다. 권력은 계급의 굴종이 존재한다. 복종을 강요한다면, 이미 마귀의 밥이 된 것이다. 그곳은 아무리 많은 성도가 몰려도, 바벨론의 우상숭배가 미운 물건으로 들어섰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돌무덤으로서 ‘짐승의 권력’을 상징한다. 바벨론은 황금신상으로 권력의 우상화가 일어났다. 이집트, 바벨론, 로마제국 등등 모든 권력은 짐승에서 비롯된다.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점점 성도의 숫자를 늘리면서 교세를 확장한다. 그러다보니 권력집단이 되어서, 결국 중세의 암흑시대와 같은 종교권력의 우상숭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단종교의 공통된 특징은 교주를 절대시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짐승의 권력이다. 이단의 교주는 성도위에 군림하면서 성경의 자의적 해석으로 하나님까지 통제한다. 놀라운 신통력이다. 민심은 천심, 성도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과연 하나님위에 군림하는 이단의 교주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번제물이 되셨다. 살아계시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무릎 꿇린 적이 결코 없다. 권력이 높아지면 높을수록 더 낮아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력이다. 그것이 아니면, 이 땅에 평화가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높음의 권력은 전쟁이요, 섬김의 사랑은 평화다. 이단처럼 변질되지 않으려면 사도 바울처럼 하면 된다. 사도 바울은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고, 예수님의 흔적을 따라서 자신도 율법의 판결을 받으면서 사명의 위치를 버리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가 “내 발을 씻어라”고 하면, 그것은 성경을 변질시킨 것이다. 언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발을 씻어라”고 했던가? 언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내게 향유옥합을 뿌려라”고 했던가? 예수님이 자원해서 모범을 보이신 세족식이며, 마리아가 자원해서 장례식을 예비했던 성결식이다. 향유옥합과 같은 예물을 종교 지도자가 강요한다면, 죽음의 십자가를 겸허히 받아드려야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돈과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좋다면서, 헌신과 희생과 베품과 낮아짐과 버려짐은 외면한다. 십자가를 외면하면서 면류관은 욕심내는 그들의 심보는 짐승의 권력이다. 그래서 이단은 아무리 잘되어도 잡초밭일 뿐이다. 부러워할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