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예언했다. 계시록 1:7에 나와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되어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1:11과 연결된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되어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즉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다. 그 구름은 자연현상의 구름이 아니고, 영적 현상으로서 구름이며, 계시록이 그것을 증언한다. 결단코, 군중 구름이 아님은 자명하다.
구름이 사람이라면, 한 개인의 깨끗한 양심으로 해석함이 합당하다. 정치인들이 유세할 때 사람들을 동원하고, 구름인파를 만들어서 세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오신다면, 교황이 바로 주님의 모습일 것이고, 대통령처럼 나타나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짐승의 권력일 뿐이다.
‘구름’의 비유를 풀려면, 계시록에 등장하는 ‘구름’의 의미로서 푸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계시록에서 ‘구름’은 영적 현상으로서 구름이며, 상징의 의미는 ‘깨끗함’이다. 가령,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과 같은 인물을 타고서 주님은 각 교회에 직접 가셔서, 편지를 보냄으로 방문하셨다. 그 또한 예수님이 직접 오신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을까?
청중구름의 위험성은 계시록 13장 4절 때문이다. 청중구름을 모은다면서 세력이 점점점 커지면, 종교권력은 짐승의 권력으로 변질된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고 되어있다. 경배를 받는 권력은 바로 짐승과 용의 권력이다. 어린양은 희생과 순교와 피흘림으로 백성의 죄에서 구원하는 사랑의 권력이다. 세력이 많아지면서, 지배하는 권력을 형성하는 것은 짐승에서 비롯된다. 세력과시는 결단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구름비유를 ‘청중인파’로 해석하는 것은 각 개인의 구원문제에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주 예수는 영적인 구름을 타고서 위에서 내려오므로, 종교 지도자부터 주님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종교 지도자가 결코 ‘주 예수의 몸’이 아닌 것이다. 종교 지도자가 주 예수가 보기에 합당하면, 함께 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 것이 계시록의 깊은 묵시다. 용과 짐승과 우상과 거짓 선지자는 그 따르는 무리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결국 멸망을 받는 바벨론이 된다. 청중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인(印)을 맞았는가, 짐승의 인(印)을 맞았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았으면 그 사상이 사랑과 베품과 낮아짐과 겸손함과 희생이다. 짐승의 인을 맞았으면 탐욕과 지배와 권세와 물욕과 소유와 압제와 교만과 통제다.
성전과 제단과 성도는 계시록 11장에 따라 척량함을 받게 된다. 척량의 심판은 말씀과 성령의 보호다. 측량해야, 그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 측량은 곧 말씀위에 서있는 것이다. 말씀위에 서있는 자는 방탄유리 속에 보호를 받는 것과 같다. 방탄유리로 된 차는 어떤 공격에도 안전하듯이, 말씀은 세상환란으로부터 안전하다. 핵심은 성경말씀으로 사느냐이다.
예수님이 타고오시는 구름이 영적인 구름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내 마음속에 양심으로 오실 수 있다. 반면, 특정한 종교지도자와 청중으로 해석하면, 행사를 해야만 주님은 출현할 수 있다. 과연, 어떤 성경해석이 보다 합리적이고 타당하겠는가? 영적인 구름으로 해석해야, 주 예수는 모든 인생가운데 직접 찾아가고, 전세계 모든 민족이 동시에 주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