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6~17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개역한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공동번역)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새번역)
네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園中各樣樹上的果子、你可以隨意喫.只是分別善惡樹上的果子、你不可喫、因為你喫的日子必定死。 (한문성경)
You are free to eat from any tree in the garden; but you must not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or when you eat of it you will surely die. (영어성경)
요즘 나는 성경의 민감한 부분을 볼 때는 번역판을 모두 본다. 개역한글이 원본이지만, 개역개정과 공동번역과 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과 한문성경과 영어성경(NIV)를 함께 검토해야 성경의 내용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히브리어도 배워보고 싶다. 개역한글이 읽기에 가장 좋다. 약간 어려운 단어가 등장하지만, 개역한글의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성급하게 만든 성경이 개역개정이다. 개역개정은 읽는 것이 운문에서 약간 벗어나거나, 개역한글에서 약간 변형된 것이다. 어떤 번역도 개역한글을 따라오기 힘들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서 그렇다. 창세기 2:17을 비교해보면, ‘실과’를 ‘열매’로, ‘정녕’을 ‘반드시’로 바꿨다. 뜻이 같은 단어교체다. 그러나, 읽어보면, 무게감이 개역한글이 훨씬 강함을 알 수 있다. 한자어가 순수 한글단어보다 훨씬 강하고, 묵직하다. 개역한글 성경을 읽으면 깊은 맛이 느껴지고, 개역개정은 그보다 얕아진다. 조선시대 순교했던 천주교 신자들은 한문성경을 봤었다. 한문성경은 개역한글보다 훨씬 깊은 맛이다. 한문은 뜻글자여서 그렇다.
선악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서, 선악지식나무로 번역함이 합당하다. “선악지식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나님은 법을 선포했다. 아담과 하와에게 말했던 특정한 그 나무는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에덴지역 작은 동산에서 발생한 그때 그사건의 진실은 모세때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으니, ‘그것이 알고싶다’ 팀이 탐사보도를 하더라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은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남겨진 사료(史料)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미 신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30년 속했던 교단은 ‘선악과=여자 생식기’로 풀었고, ‘생명나무=남자 생식기’로 해석했다. 비유의 맥락으로 보면, 선악과가 여자 생식기면, 생명과가 남자 생식기로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생명나무는 그 생김새가 길어서 그렇게 비유하는 것 같다. 어쨌든, 생명나무는 남자, 선악나무(선악과)는 여자다. 나는 그렇게 배웠고, 따먹은 그 사건은 이성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정말로 엄격하고 철저한 순결주의가 요청되었고, 음란물(포르노)를 보는 것은 중대범죄였다.
게다가, 창세기 3:2에서 하와가 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말하는데, ‘만지지도 말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자위행위’로 해석한다. 그래서, 자위행위는 개인이 행하는 이성범죄로서 금지됐다. 법이 선포되면, 양심이 가책되니, 참 힘든 신앙생활을 견뎌야했다. 금욕주의의 결정판이다. 그 덕분에 나는 47세 이혼남이지만, 경건한 신앙심으로 세상향락에 빠지지 않고 지금도 순결주의를 지향하며 잘 살고 있다. 내가 입은 은혜는 은혜다.
그러나, 창세기 사건은 창세기일 뿐이다. 아담의 범죄가 무엇이든,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죄를 해결했고, 이제는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야하는데, 창세기의 범죄가 이성범죄라고 해석한다고 해서, 지구촌에 이상세계가 이뤄지겠는가? 신화를 실화로 해석하는 순간, 너무 엄청난 부작용이 따른다. 그 뒷감당은 누가 책임져야하는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 바로 “선악과와 같은 민감한 비유”를 임의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것에 손을 대면,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기 법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포된 것이다. 그 법을 범한 인물이 아담과 하와고, 공범이 뱀이다.
창세기 법이 이성범죄라고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아브라함은 사라가 하갈을 줘서 아브라함이 따먹었고, 99세가 되어서는 경수가 끊긴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이성관계를 통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법을 선포하고, 그 법을 따르느냐, 범하느냐로 운명이 좌우된다. 아브라함에게는 ▲고향을 떠나라 ▲아버지를 떠나라 ▲조카 롯과 결별하라 ▲아내를 떠나라 ▲자식을 떠나라의 고통스런 법률을 선포했고,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 선(善)이고, 말씀을 범하는 것이 악(惡)이다. 선악의 기준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선악지식의 나무’이며,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은 선악의 기준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이단이나 인본주의자들은 중세사회에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선악지식의 나무에 손을 댈 때가 많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문명 가운데 선악의 기준점이 되신 것은 섬김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해 생명을 내놓으신 그의 아름다운 사랑이 영원한 현재로 흐른다. 그런데, 이단들은 ‘주 예수’의 기준점을 바꾸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선악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다.
“정녕코 죽으리라”보다 더 강한 문장이 계시록에 등장한다. 창세기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고, 계시록에서는 그것보다 더 강력하게 금지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주 예수의 기준점’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가장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주 예수’가 모든 마침표이고, 종착역이고, 끝맺음이고, 오메가이며, 결말임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 증거하신 이=주 예수
* 내가 = 주 예수
맨 끝 구절에 주 예수가 4번이나 등장한다. 이것은 변경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점이다. 그 누구도 여기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주 예수’의 자리에 ‘주 00’이 들어가는 그가 마귀요, 적그리스도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해당된다. 그 누가 성경을 폐할 수 있는가? 성경을 벗어나서 성경을 해석하면, 그는 성경을 폐하는 자가 되므로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동산 중앙의 열매는 무엇이든 따먹으라고 한 것처럼 그렇다. 그러나, 선악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고 했다. 기준점은 절대로 변경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기준점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말씀이며, 하나님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해석의 달인이다.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를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 않는다. 사도들의 해석과 확연히 달랐던 사도 바울의 성경해석이지만, 우리는 사도 바울을 적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선악지식의 기준점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을 해석해서 그렇다. 주예수를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은 거짓이요, 비진리다. 기준점이 ‘주 예수’라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