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가장 극명하게 대립되는 두 인물로서 아기 예수와 헤롯 왕이 있고, 다음은 예수님과 가룟 유다다. 예수님은 제자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팔려서 죽임을 당했다면,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신한 것을 후회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극명한 대립구조다.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라고 기록하면서, 빌라도에 넘겨진 그 때에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처럼 편집했다. 그러나, 두 사건은 상관관계가 있을 뿐, 시간적 의미로 해석하기엔 개연성이 부족하다. 예수님은 토요일 오전 즈음에 법정에 넘겨졌고, 가룟유다가 그것을 계속 지켜봤다는 것인데, 베드로도 도망쳤는데 과연 가룟 유다가 그렇게 했을까싶다.
누가는 가룟 유다가 받은 30냥과 자살사건을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에서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라고 설명한다.
‘피밭’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모두 동일한데, 마태는 제사장이 밭주인이고, 누가는 가룟 유다가 밭주인이라고 설명한다. 마태는 자살로 묘사하고, 누가는 추락사 또는 타살로 묘사한다. 어떤 죽음이든,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당일에 일어난 것은 아님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룟 유다가 30냥을 반납하고, 제사장이 그 돈으로 밭을 사고, 그 밭에서 가룟 유다가 우연히 죽기까지, 최소 몇주의 시간은 필요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활후 자살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죄는 오십보 백보다.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 넘긴 죄에 대해 정죄한다면,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살해하는데 앞잡이가 된 사도바울은 어찌 주 예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가? 기독교인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다메섹으로 파견받은 사도 바울이 극적인 참회로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죄의 경중(輕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앞에 무익하다. 왜 가룟유다는 자살했을까?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한다. 우리는 두 사건을 동시에 겹쳐서 이해하다보니, 동방박사가 선물을 가져온 시점을 마구간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아니다. 태어난 것은 마굿간이지만, 동방박사가 선물을 가져온 것은 한참 이후 사건이다. 태어난 날, 동방박사가 왔다면 목동을 마주쳤을 것인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를 보더라도, 마굿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은 인구조사를 하려고 갑자기 호적신고를 하다보니, 여관방 부족 때문에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게 된 것이고, 이후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다가 동방박사의 방문을 맞은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려고, 동방박사들은 멀고 먼 타향에서 낙타를 타고 왔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 예물을 드렸다. 근교에 있는 헤롯 대왕은 왜 경배하지 못하였을까? 예수님의 죽음과 직접 연결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서 뉘우치면서, 왜 자살을 결정했을까? 반면, 베드로는 훗날 순교의 죽음을 택했다.
인간(人間)은 사람 자체가 아니고, ‘사람의 사이’를 말한다. 사회적 관계에서 사람의 위치를 뜻한다. 나와 너, 나와 남, 나와 사회, 나와 공동체, 나와 가족이 곧 인간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헤롯 대왕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가룟 유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자신과 직접 상관있었다고 깨달았다면, 후회에서 회개로, 회개에서 참회로, 참회에서 변화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자신이 풀어야할 숙제를 남겨놓고, 가룟 유다는 자살했다. 얼마나 무책임한 존재인가?
내가 30년 있던 곳을 떠났을 때, 나에게 용기와 격려를 보내온 사람이 2명이다. 그 두 사람은 나의 인격을 신뢰하는 분들이다. 그래서 나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신념과 신앙이 존중받기를 나로부터 진실로 요청하였다. 신념의 존중은 헌법에서 보장된 종교의 자유이며, 종교의 자유에는 ‘신념과 비판’이 모두 포함된다.
내 인생의 나이 47세, 이제 4시간이 지나면, 억지로 1살을 먹어야한다. 시간의 여신(女神)은 내게 1살을 선물하고, 1년의 수명을 가져갈 것이다. (가져갔음을 숫자로서 표기할 것이다.) 48세가 되는 2019년, 나는 묶은 것을 풀고, 헝클어진 것을 정리하고, 옛 것을 새롭게 하고,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고, 가면의 위선을 벗어버리고, 활짝 웃는 진실함으로 살아갈 것이다. 가야한다면, 월명동에도 가보리라. 그러나, 지구 전체를 하나님의 월명동으로 생각하리라. 달이 있고, 해가 있는 지구촌 월명동.
내게는 풀어야할 숙제가 있으니, 평온한 가정을 꿈꿨으나 하늘은 내게 호세아의 길을 걷게 하여, 그곳에서 창녀의 본질을 깨닫게 하였다. 내가 호세아의 심정을 가졌다고 자부하였으나, 나는 언제나 고멜이었다. 고멜이었다. 내게도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신의 뜻을 따라 가리라.
47세, 그 끝에서 십자가의 본질을 배웠고, 믿었고, 깨달았고, 나는 인자의 권력으로 살아갈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그리고 겸손하자고 내게 약속하였다. 언제나 혼자여도, 일어나면 나는 글을 쓰는 나를 발견하며, 내가 나에게 친구가 되므로, 주님의 소명을 받든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 목사님이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홀로사는 삶은 외로움이면서도 고귀한 단순과 자유입니다”라고 글을 보내주셨다. 참으로 마음속에 위안과 평안이 스민다. 내년에는 더욱 진실하게 살아가리라. 그리스도 품 안에서.
** 기해년(己亥年)은 몸 기(己) 돼지 해(亥)다. 몸 기(己)는 ‘리을’ 모양이며, 기도하는 모습이고, 새끼줄 모양을 본떴다. 묶음의 뜻이다. 亥는 돼지다. 돼지는 뱀을 막는 역할이다. 돼지는 살이 포동포동해서, 열매를 상징한다. 12마리 동물에서 가장 끝에 위치한다. 성경적으로 ‘오메가’를 의미하다. 2019년에는 모든 사건이 끝맺고, 정리되고, 마무리되고, 해결되고, 종결짓는 해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