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 관점을 가져야한다.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과 흡사하다. 역사란 무엇인가(에드워드 카)를 읽어보면, 역사와 현실이 어떻게 소통하는지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성경은 사건이 발생하고, 그 이후에 적혔다. 성경은 복음을 중심한 역사책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연결해서 해석한다. 아멘!! 완벽한 상징이요, 역사적 표징이다. 과연 그러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영원히 결별했고, 디아스포라는 유대교와 함께 기독교에도 동시에 찾아왔다. 슬픈 비극은 카타콤과 순교의 피로 얼룩졌다. 결별과 이혼은 이처럼 아프고, 괴롭다.
티토 장군처럼, 지금 시대에 시진핑이 한반도를 점령하거나, 북한의 김정은이 서울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은 국민과 교회와 기업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십자가의 죽음때문이라고만 생각할 뿐, 그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에 갇혔음을 망각한다. 예루살렘 멸망이 유대교의 디아스포라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단들은 공통적으로 ‘이단만’을 위한다. 편협하고, 이기적 발상이다. 예수님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포괄하면서 원수까지도 포용하고, 로마 제국까지도 사랑하셨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배포는 그와 같아야한다. 왜 불교까지 용납할 수 없는가? 왜 다양한 인문학을 섭렵하지 않는가? 불교는 기독교를 공략하기 위해서 인재를 양성해서 해외 유학을 보낸다. 이슬람도 인재양성을 위해서 대한민국에 국비 장학생을 보낸다. 기독교는 인재양성을 위해서 얼마나 투자를 하는가? 동성애 집단만 해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전쟁에 임하는 장군처럼 사상을 중무장한다. 기독교인은 교회의 성문안에서 무엇을 하는가? 십자가는 결코 침대가 아니다. 저주의 십자가에서 생명을 선물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다시 각인해야한다.
대통령의 탄핵사건은 민주주의가 몰락한 상징이다.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자가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메달린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뉴스는 묵시가 되어 각 개인에게 질문의 총탄을 날린다. 탄핵(彈劾)은 각 개인의 양심을 향한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암흑을 가져왔다. 보수의 몰락이 진보의 승리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는 시소게임이 아니고, 공동운명체다.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교에 속했으나, 기독교인은 기도했어야 했다. 예수님은 끝없이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해서 성전청결 운동에 앞장 섰다. 예수님은 끝없이 유대교 절기를 지키면서, 살해 음모가 있는줄 알면서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요즘 내가 다니는 교회는 눈물과 애통으로 국가의 현실과 미래를 놓고서 기도했다. 진실로 감동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걱정했다. 제자들은 도망가서, 디베랴 호수로 낙향했을 때, 그때도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를 걱정했다. 언제까지 옹졸하게 살 것인가? 나를 중심하고, 나의 종교를 중심하는 그 세계관은 천동설적 사고관이다. 중세 암흑시대가 그러했다. 태양이 돈다는 생각,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행성이 돈다는 그 생각, 선민사상의 오류다.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지구도 돈다.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돌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한다. 나를 포함해서, 교회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진실로 눈물뿌려 기도해야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진실로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