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인재 양성’이다.
예수님의 목회활동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제자 양성’이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성도 양성’이다.
양성(養成)은 양육해서 성장시킨다는 뜻이다. 양육은 부모가 자식을 기르듯이, 성(成)은 칼로 성을 지키듯이, 그렇게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와 성전이 연결되는 상징법을 놓고, 정반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었으니, 곧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당했다. 그렇듯, “예루살렘 성전이 온전하면 예수님도 죽지 않는다”는 궤변을 믿는 인본주의가 있다. 성전을 생명보다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되었다. 사람이 건물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건물은 부동산이다. 부동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등기부등본을 보면, 표제부가 있다. 그곳에 이름이 계속 나열된다. 맨 위에는 부동산의 주소가 있고, 그 밑에는 이름이 계속 바뀌면서 마지막까지 간다. 맨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 부동산의 소유자다. 상속이나 매매를 통해서 부동산의 소유권이 넘어가는데, 사실은 부동산은 움직이지 않고, 문패만 바뀌는 것이다. 건물의 부동산이 움직이지 않듯이, 등기부 등본의 부동산도 움직이지 않고, 문패만 바뀐다. 소유권이 넘어간다는 표현은 사람중심의 해석이고, 부동산 입장에서는 문패만 바뀌는 것이다. 문패는 곧 주인의 이름이다. 결국, 사람이 건물의 주인이다.
예수님은 죽음의 십자가에서 생명을 얻으셨다. 12제자 중에서 1명을 잃고, 11명의 제자들을 모두 얻었다. 예수님의 목회활동 3년은 성전건축이 아니고, 생명건축이었다. 성전은 갑작스런 정치상황에 의해서 없어질 확률이 높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했던 터키는 현재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갔다. 건물을 차지하는 것은 영원한 승리가 되지 못한다. 인재를 양성하면, 사람은 건물의 주인이 되거나, 지식의 주인이 되어서 복음의 특공대가 된다. 건물이 영원할 것 같아도,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면 관리자가 없어서 망한다. 부모가 재산을 축적해도, 자식이 아버지의 가훈을 받들지 못하면 상속받은 재산은 금방 사라진다. 집보다 자식이다. 나의 아버지는 “논 농사보다 자식 농사가 100배 어렵다”고 항상 말씀했다. 자식농사는 곧 성도농사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통째로 주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배포가 크시다. 사람이 집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지역을 생각하신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제대로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신본주의로 살아야하는데, 뱀의 말을 중심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외면했다. 그래서 추방당했다. 인재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식교육에 실패하면, 형이 동생을 미워해서 죽이는 존속살해사건이 일어난다. 짐승의 권력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가인의 살인사건이다. 힘이 세다가 힘없는 동생을 폭행하는 것, 그것이 짐승의 권력이다. 네로가 기독교인에게 방화범의 오명을 뒤집어 씌울 때조차, 사도 바울은 “원수를 복수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랑의 인내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사도 바울 영화를 보면 자세히 나온다.
왜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일으켰던가?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서 그렇다. 집을 재건축하려고 홍수심판을 일으킨 것이 결코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노아와 그 가족들이다. 배를 건축한 것도 사람을 위해서였다. 노아의 배는 흔적도 없지만, 노아의 후손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역사가 이어졌다. 고향을 떠나, 평생 이사를 하면서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일은 ‘이삭’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심,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이삭의 쌍둥이중에서 기대를 받았던 에서가 이삭의 재산을 100% 상속받았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면서 장자권을 탈취해서 가족간 분쟁을 만들었던 야곱은 아버지의 기대에서 어긋났다. 라반의 집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21년을 살았던 야곱, 아버지의 그늘에서 평안하게 살았던 장남 에서, 둘은 극명한 대립구조다. 기대했던 에서는 기대를 채우지 못했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야곱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받았다.
12아들, 이스라엘로 개명한 야곱은 누가 성공해도 걱정하지 않을 팔자였다. 가장 기대했던 요셉은 어느날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비보(悲報)를 들었다. 남은 자식들에게 기대를 걸면서 여생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늙은이가 되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죽은 요셉이 살아왔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표징’이 아니겠는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뉴스는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암시한다.
야곱의 신앙은 요셉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신다. 요셉 1명을 세우시니, 이집트에서 바로왕이 두려워할 정도로 민족이 커졌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은 모두 장막을 치면서 그렇게 살았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양성했다. 창세기는 인재양성이 핵심이다. 아담과 하와가 종교의 조상이라는 것은 바로 각 분야의 조상이 될 정도로 인재를 양성하라는 의미도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