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너를 위하여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베드로와 물고기 비유는 마태복음 17장에 등장한다. 내가 30년 있었던 곳에서 기본을 배웠고, 소의 되새김질을 통해서 그 말씀을 더 깊게 연구하고, 해석하는 영성 훈련을 요즘 하고 있다. 배움은 끝이 없다.
마태는 금융업자 출신이다. 사채업자다. 대부업자는 고리대금업을 하기 때문에, 돈보다 사람의 사연에 관심을 갖는다. 사채업자가 돈을 버는 이유는 돈보다 사람의 사연을 알기 때문이다. 돈만 보면 돈을 못 번다. 사채업자와 금융전문가를 만나보면, 사람의 사연을 정말로 잘 안다. 사람의 사연속에 돈이 있어서 그렇다.
마태복음은 사채업자 출신인 마태가 썼기 때문에 시간전개에 따라 진행되지 않고, 사건전개로 진행된다. 큰 틀은 시간전개이지만, 사건을 따라서 진행되고, 어떤 사건은 시간과 전혀 상관없이 편집된 경우도 있다. 마태복음 17장이 특히 그렇다. 마태로서는 세금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반세겔은 성전세인데, 주민세를 뜻한다. 1년에 5만원을 내야하는데, 예수님이 세금독촉을 받았던 것이다. 민망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베드로도 함께 내지 않았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야하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베드로와 물고기 사건에서 핵심은 ‘물고기=사람’이 아니다. 비유를 풀었을 때는 감동과 교훈이 있어야한다. 마치 인봉을 풀었을 때에 보물이 있는 것과 같다. 비유는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다. 비밀이 드러나면, 뭔가 깊은 감동이 밀려와야한다. 그것이 비유를 푸는 의미다.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한세겔이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야한다.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이신데, 성전세를 받으실 주님이신데, 세금징수원이 왔을 때 무렴을 주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주셨다. 그리고, 덤으로 베드로의 것까지 챙겨서 세금을 납부하셨다. ‘나와 너를 위하여’라는 대목은 지도자들에게 깊은 묵시를 전달한다. 따르는 자를 챙기는 예수님의 인격이 바로 ‘인자의 권력’이다. 세상 권력은 “나를 위하여 절대 충성하라”이고, “너 것을 내게 바쳐라”이다. 예수님은 “나와 너를 위하여”이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밀린 세금을 납부하셨다. 실족(失足)은 발을 잃다는 의미로서, 넘어지는 것이다. 실수(失手)는 손을 잃다는 의미로 뭔가 떨어뜨리는 것이다. 세금을 내라고 독촉한 사채업자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실족할까봐” 세금까지 내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어린양의 마음인가? 만약 예수님이 짐승같은 생각으로 마태를 불러서 “네 동료들이 이렇게 몰상식하게 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라고 따졌다면, 성경에 어찌 기록되었을까?
베드로를 비롯하여 대부분 제자들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서 살려고 했던 이유는 ‘나와 너를 위하여’의 공동체 삶 덕분이다. 마음을 나누는 것은 5만원의 세금을 챙겨주는 것에서도 가능하고,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십자가 위에서 제자들의 죄문제를 해결하신 것에서도 가능하고, 무덤에서 살아나서 비겁의 무덤에 갇힌 제자들과 함께 한 것에서도 가능하다. 예수님은 목회활동 내도록 ‘나와 너를 위하여’의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신 분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성전세 문제를 해결했더니 자신의 성전세도 해결된 것이다. 베드로 입장에서 비서실장의 월급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부인이 바가지를 긁었을 수도 있다. 어부가 그물 대신에 입으로 살고 있으니, 처가댁에서는 핍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의 성전세 5만원을 해결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베드로 지갑에 5만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좋아하시고, “나와 너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생이 살아가면서 “나와 너를 위하여”를 쓸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이런 관계를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십자가를 앞두고 죽기전에 미납한 세금 5만원을 지불하신 예수님이시다. 4천년간 체납한 아담의 범죄까지도 대신 짊어지고 죄값을 담당하신 예수님이시다. 용서를 구할 것이 있다면, 기꺼이 그리스도앞에, 형제앞에 마땅히 사죄함으로 밀린 부채를 탕감해야한다. 돈이든, 마음 씀씀이든, 양심 불량의 속임수든, 채무를 청산하고 살아야한다. 이것이 새로 쓰는 베드로와 물고기다. 디베랴 호수에서 예수님은 기어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생선구이로 아침밥을 함께 먹고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그 물음은 곧 베드로의 깊은 신앙고백이었으리라. 베드로도 결국 예수님을 부인한 마음의 부채를 예수님을 만나 사죄함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용서할 용기보다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때론 힘들때가 있다. 용서를 구할 때 을이 되기때문이다. 을이 되면 어떤가. 채무가 탕감된다는데, 바짝 엎드려 용서를 구하자.
내지 않아도 되는 성전세인데, 예수님은 내셨다.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해야할 사건이 살면서 있다. 사회속에 있다보면, 문화와 관습과 제도와 인맥에 얽혀서 함께 따라야할 예법이 있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주님은 성전세를 납부하셨다. 그들까지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까지도 공동체로 여기시고, 그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인격이시다.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할 그리스도의 인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