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밖의 것을 가지고 성경의 질서를 헝클어서 재조립하게 되면, 본질이 희석된다. 맞는 것 같지만, 맞지 않다. 성경은 구약이 문제집, 신약이 풀이집이다. 신약이 곧 답안지이고, 정답이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다. 구약의 모든 문장의 마침표는 예수님이다. 문장에서 마침표는 맨 끝에 위치하고, 가장 밑에 있다. 그처럼 예수님은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으로 내려오시고, 가장 낮은 백성의 신분에서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시고,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서 종국의 마침표가 되셨다. 그래서 그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사셨다. 졸(卒)은 마칠 졸(卒) 병사 졸(卒)이다. 무기 없이 군복만 받은 병사를 일컬어 졸(卒)이라고 했다. 졸(卒)은 왕을 위해 대신 죽는 희생양이다. 예수님은 졸(卒)로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그래서, 구약의 최종적 마침표가 되신 것이다. 마쳤으므로, 다시 시작의 문이 열린다. 그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율법에 따라 판단받음으로 율법의 마침표로서 끝냈으니, 새로운 은혜와 진리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할 때는 ‘예수님=정답’이라는 기준점을 설정하고서 봐야한다. 이것이 어긋나면, 주춧돌이 흔들려서 신앙의 건물 자체가 붕괴된다. 절대원칙이다. ‘예수님=정답’의 설정으로 성경을 깊게 묵상한 이후에, 그 깨달음과 교훈에 근거해서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봐야한다. 자신의 삶을 기준해서 성경을 대비하고 비유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기준은 성경이며,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다.
위에서 분석한 내용(요시야와 예수님)은 예수님을 기준해서, 요시야의 삶을 분석한 것이다. 그처럼 예수님을 기준해서 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영성훈련을 할 때,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성경이 삶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성경은 독서를 넘어서서, 말씀이 실체가 된다. 과거에 W(더블류)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 주제는 만화속 주인공이 실체 세계로 나온다는 설정인데, 과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그러하고, 우리가 말씀을 깊게 상고하면, 그 비밀의 통로를 통해서 성경속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집에, 직장에, 친구모임에, 학교에, 교회에, 나에게 나타날 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드라마처럼, 레벨 100이 되면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되어서 엠마에게 건네주면 비밀의 세계가 열리고, 성이 붕괴되듯, 경험을 통한 말씀의 체득과 연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서 ‘경험’은 곧 ‘말씀을 중심한 경험’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내가 느고다” “내가 사명자다” “내가 교역자다” “내가 사역자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그 분야 전문가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라고 자부하면서, 느고의 입장이 될 때, 항상 요시야에게 강요하고 강압하고 “믿어라”고만 한다. 만약, 예수님이 느고의 입장이라면 어찌 하셨을까? 이 또한 새롭게 연구해볼 분야이다. 예수님은 느고의 문장에서도 영원한 마침표로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였으니, 느고의 문제에 대해서 답안지는 ‘예수님’이다. 성경연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느고가 옳고, 요시야는 틀리다”가 아니다. 느고도 틀렸고, 요시야도 틀렸다. 또한 느고도 옳았고, 요시야도 옳았다. 모두 부분만 가지고 있다. 모든 정답의 완성은 예수님이다. 그래서 느고도 예수님과 비교하고, 요시야도 예수님과 비교해야한다. 느고와 관련해서 논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의인이지만,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심판주로서 오셨지만, 심판받는 죄인이 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는 홀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했지만, 이후에서는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고, 더불어 제자들에게 권력(귀신을 물리치는 힘)을 나눠주셨다. 사명자는 이래야한다. 느고는 “내가 사명을 받았으니 막지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독재를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느고는 자신의 강대국만 자랑했지, 영적인 강대국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나타났는지도 몰랐으며, 자신이 추구하려는 국익으로서 앗수르와 동맹관계에서 이스라엘이 매우 중요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막강한 군사력만큼 지정학적 위치로는 이스라엘이 강했다. 서로 존중받을 입장인 것이다. 결국, 자기 것만 최고다고 할 때, 사명자도 교만의 실수를 하고 실패한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만큼,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상대적 사명자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만년필은 그렇게 뚜겅이 덮여야 만년필이다. 느고가 만년필이면, 요시야는 만년필 뚜껑일 수 있다. 아무리 비싼 만년필도 뚜껑없이는 쓸 수가 없다. 만년필과 만년필 뚜껑은 사명의 짝을 말한다. 느고가 실패한 것은 요시야가 막아서가 아니다. 느고가 요시야의 사명을 몰라서 실패한 것이다. 사명자는 반드시 자신을 도울 상대적 사명자를 알고서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뤄야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도울 사명의 짝으로 세례요한을 알아봤고, 세례요한도 역시 알아봤다. 그렇게 두 사명자는 그 시대앞에 순교의 정신으로 위대한 역사를 열었다. 인류역사속에서 신의 소명을 받고 그렇게 아름다운 평화의 종교혁명을 했던 일이 있던가?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