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내게 왔다. 예수님은 부활후 제자들에게 “성경을 상고하면, 그곳에 내가 있다”라고 말씀했다. 말씀이신 주님이 이땅에 오셨다가 말씀으로 돌아가셨던 것이다. 성경의 주인공은 오직 주 예수다. 주인공은 곧 주인이다. 이단들은 성경의 주인공을 바꾸는 족속이다. 극히 조심해야한다. 에덴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관리자로 아담을 데리고 왔을 뿐이다. 회사로 보면 전문경영인을 데려왔던 것이고, 농장으로 보면 관리자에게 농장을 맡긴 것이다. 집으로 말하면 세입자에게 무료로 사용하고, 건물관리를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주인처럼 하도록 허락하니, 주인이 되려고 탐욕을 부리다가 쫓겨난 것이다. 에덴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듯,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이 개념이 헝클어지면 절대로 안된다.
누가복음 17장 1~10절까지 읽어보면, 회개와 용서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실족’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지만, 이 내용은 15장에서 이어진다. 당시 창녀와 세리들이 한꺼번에 회심하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돕지는 못할망정 찬물을 끼얹었다. 죄를 자복하려고 마음 문을 연 창녀와 세리들에게 “정죄의 시선”을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돌아온 탕자 비유 ▲옳지 않은 청지기의 채무 탕감 비유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하시고, ‘실족’(失足)에 대해 말씀하셨다. 핵심은 하나다. 창녀와 세리들이 교회에 잘 정착하도록 모두 협력하라는 것이다.
실족(失足)은 ‘발을 잃다’는 뜻이다. 실수(失手)는 손을 잃다는 뜻이다. 손에서 물건이 툭 떨어지는 것은 물건이 손을 잃은 것이다. 뭔가 잘못했다면 그것을 ‘실수했다’라고 표현한다. 실수는 작은 일, 실족은 큰 일이다. 실수하면 손이 떨어지고, 실족하면 몸이 떨어진다. 손과 발의 역할이 달라서 그렇다. 실족은 크게 넘어진다. 돌부리가 있어서 넘어지면 그것은 자기 잘못이다. 그러나, 누군가 발을 걸어서 넘어지면, 그것은 발을 건 사람의 책임이다. 창녀와 놀다가 재산을 탕진한 차자가 돌아왔다. 그런데 장자는 형제애는커녕 탐욕 때문에 ‘차자의 회심’을 넘어지게 한다면, 그 죄가 장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왔더니, 99마리 양들이 그 1마리를 왕따시켰다면 결국 99마리가 넘어지게 하는 집단이 되어서 연자맷돌을 메야한다.
부자는 엄청난 재산과 음식을 가졌으나, 상가지구(喪家之狗)처럼 살던 거지 나사로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옷도 주지 않으면서 ‘실족한 배고픔’으로 거지는 죽었다. 상가지구(喪家之狗)는 집을 잃은 개를 말한다. 실족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실족시킨 부자는 연자멧돌을 매듯 지옥에 떨어졌다. 부자는 장자요, 거지 나사로는 차자와 같다. 회심한 차자가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매정한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 그룹을 강력하게 교육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진실하심은 교육을 자신부터 시작해서, 제자 그룹에 실천덕목으로 삼게 하신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것도 문제요, 용서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회개와 용서는 항상 4단계로 진행된다. ①범죄 ②죄인식 ③회개 ④용서다. 창녀와 세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권면을 통해서 ③회개의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회개가 지속되어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 수 있게 도와줘야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다. 형제에게 죄를 지은 것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다.
용서(容恕)는 용납하는 것이고, 상대를 동격(同格)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인생은 살다보면, 죄(罪)를 지을 수 밖에 없다. 땅에 마찰력이 있듯이 죄는 미세먼지처럼 필연적이다. 죄는 잘못 쓴 글씨와 같아서 회개의 지우개로 지워야한다. ‘나’를 ‘너’로 잘못 썼으면 고쳐서 다시 써야한다. “나는 죄인이다”는 문장을 써야하는데 “너는 죄인이다”라고 썼으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소한 것이 틀림으로 뜻이 정반대가 된다.
회개의 지우개로 고쳐야한다. 회개의 지우개로 고칠 때, 용서하는 것은 새롭게 고쳐진 것을 뜻한다. 회개와 용서는 쌍방이 동시에 해야한다. 회개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용서해주지 않는 것도 ‘더 큰 범죄’임을 자각해야한다. 회개한 차자보다 용서하지 않은 장자의 죄가 더 무섭고, 은밀하고, 지옥에 갈 죄(罪)임을 알아야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족속은 곧 장자의 입장이었는데,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그들을 “뱀새끼”라고 지적했다. 창세기의 그 뱀을 말한다.
뱀의 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범죄를 무화과잎으로 가리고, 아담은 죄를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떠넘기는 작태를 보였다. 장자가 차자를 비판할지나, 혹여 차자의 죄가 혹여 장자의 것은 아니었던지, 깊게 상고해볼 일이다. 장자가 싫어서 차자가 집을 떠났다면 장자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래서, 회개와 용서는 하나의 세트로서 함께 이뤄져야한다.
[누가복음 17장]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