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를 제일 좋아한다. 지난주 주일예배에서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들었는데, 마음이 애잔해졌다. 나도 모르는 내 안의 폭풍이 솟아오르는데, 아!! 고요한 폭풍이 내 안에 있었음을, 그런데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주님이 잔잔케 하시려고 폭풍과 싸우고 계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오늘은 집에서 찬송가를 펼치는데, 345장이 접혀져 있었다. 주일날 내가 표시한 것이다. ‘표시’(標示)는 언제나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안내자가 된다. 30년동안 내가 떠났던 십자가의 표지판이여!! 10년을 하루로 환산해서 나는 3일의 긴 골고다에 살았던가!! 그곳에서도 버림을 받은 내 인생앞에 십자가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내 남은 여생에 돛대가 되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마태복음 5:13)
내가 다시 십자가를 받아드린 이유는 마태복음 5:13 때문이다. 30년 있었던 곳에서는 ‘불교의 수련활동’처럼 40일 조건기도, 새벽조건기도, 노방 1000일 조건, 노방 2000명 만남 조건, 1000일 조건기도 등등 끝도 없는 댓가지불에 불안한 신앙생활을 했었다. 휴거가 됐다고 하는데, 그것도 불확실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접하니, 목사님이 “너는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성경말씀을 주셨다.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가 아니었다. 30년 있었던 곳에서는 “되어라”고 했는데, 주님은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이미 은혜를 주셨다. 아!!! 이렇게 자상한 주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늘은 가만히 생각했다. 왜 신랑되신 주님이라고 강조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시대에는 신랑보다 친구가 더 가까운 개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친구’와 그 시대 ‘친구’는 정의가 다를 수도 있다. 남편은 오히려 주종의 개념이 강하다. 로마시대의 가부장적 제도는 남편이 곧 왕권과 같다. 반면 친구는 동등개념이다. 야곱도 두 아내를 14년의 노동력으로 구매했지 않던가!! 아내는 소유개념이고, 친구는 협력개념이다. 하와를 ‘돕는 배필’로 허락하시듯, 아내보다 가까운 친구로서 주님은 제자들을 대하셨다. 친구속에는 신랑의 개념도 포함된다.
인생은 하루 3끼 먹고 잠잘 시간 준비한다. 사춘기때, 청년때, 중년때 3끼 밥먹듯 삶을 살고, 마침표를 찍어야한다. 50세가 넘어가면, 어떻게 죽을지 겸허하게 준비하면서 살아갈 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을 맞을까? 이 땅에서 30년이 한꺼번에 유실되니, 벌써 50세를 바라본다. 어이없는 내 인생살이다. 그래서 찬송가 345장이 내 심금을 울렸다. 나의 지금이 그러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