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아직 살만한 세상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십자가 사건은 비극으로 끝난 기독교 역사였다. 십자가는 누가 봐도 ‘죽음과 실패와 멸망과 저주와 버려짐과 살육과 절망’의 대명사이다. 예수님조차 “이 잔이 나를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간구하셨다. 인생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하지만, 오늘은 이 죽음이 내게 임하지 않기를 누구나 간구한다. 살아있음을 감사할 인생들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죽음으로 종결되었으나, 끝이 새로운 시작을 낳았다.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이 얻어진 것이다. 부활은 다시 살아남이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한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죽었음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인생이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 영적 천국에 갈 수가 없다. 죽어야만 인생은 천국으로 간다. 그래서 별세(別世)다. 별세는 세상과 이별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2가지 구원을 선물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3일을 금식하고, 왕께 나아갔다. 그리고 하만이 장대에 달리는 대역전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처럼, 주님은 3일의 긴 골고다 길을 걸으시면서, 세상속에서 짓밟히시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이후 40일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약속한 진리의 성령이 임하니, 제자들을 통해서 유대교는 새롭게 변혁했다. 그래서 40년동안 무장독립투쟁이 평화모드로 서서히 바뀐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민족의 죄가 씻겼고, 제자들의 헌신으로 백성들이 서서히 하나님께로 돌이켰다. 그러나, 유대교 종교 지도부가 썩었으므로 로마에 결탁하거나 로마에 반대하는 지도부들 때문에 혁명세력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로마군대와 충돌하면서 예루살렘은 붕괴되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 멸망을 40년간 연장하므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다. 민족에는 평화요, 기독교에는 생명이요, 로마에는 돌이킴의 기회였다. 결국,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영생길을 열어주셨고, 에스더 사건처럼 주님의 백성은 영원히 죽지 않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이다.
육체가 살아난 것은 육체를 가진 인생들이 영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가 영체와 연합해서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육체의 행실’이 영체와 연합해서 부활한다. 예수님의 육체가 부활한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않음으로 육체가 죽은 것이다. 아담에게 준 법이 하와에게 주어졌다. 예수님께 준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예수님의 육체가 살아났음을 믿는 자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부활을 약속받는다. 육체의 살아남을 믿지 않으면, 육체를 가진 인생은 부활을 약속받지 못한다.
어떤 종교는 예수님이 육체로 임한 것조차 믿지 않는다. 자신을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이단종교는 모두 ‘예수님의 육체로 임함’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 해당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다.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믿지 않으니까, 스스로 재림주가 될 수 있다고 변질되는 것이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죽는다. 그처럼 하나님도 이 땅에 한번 태어나시고 죽으셨다. 하나님도 두 번 태어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두 번 태어나시면 하나님의 육체는 2개가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윤회설이 된다. 성경의 진리는 한번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육체로 태어남이 아니다. 재림은 영체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이다. 육체가 직접 살아났으니 역시 육체로 임하시는 것도 된다. 마리아를 통해서 잉태된 예수님은 아기예수-소년예수-청년예수-죽은예수-부활예수로서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기독교는 이것이 본질이다. 자신을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들이며, 예수님의 육체가 살아난 것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부정한다. 결국, 그들은 이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