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내게 ‘방향과 속도’에 대해 말씀해준 여인이 있었다. 그때 그문장은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 ‘방향과 속도’는 내 인생의 가치관이 되었고, 나침반이 되었고, 방황과 배회와 고뇌에 빠질 때마다 의지하는 밧줄이 되었다. 속도를 내려는 탐욕앞에 주님은 묻는다. “어디로 가느냐?”고
30년이 30일처럼 지났다. 나는 순천고 40회다. 그처럼 나는 기독교복음선교회를 2018년 졸업했다. 졸업하니, 주님께서 내게 구원의 증표를 허락하셨다. 나는 그곳에 있어야만 구원과 휴거의 자격증이 나오는줄 알았는데, 벗어남으로 졸업의 증표로서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님이시다. 이단도 주님의 큰 교회안에서 ‘영적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이다. 사람마다 다양해서 10년만에 그곳을 졸업한 사람도 있고, 20년만에 졸업한 사람도 있고, 나처럼 우둔하여 30년만에 졸업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곳을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하거나 자퇴함으로 무신론에 빠지기도 한다. 각양각색이다.
전자발찌처럼 내 사상은 아직도 그곳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내가 순천고 졸업생이고, 내가 해병대 출신이듯, 졸업한 배경을 지울 수는 없다. 주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진리가 되었듯이 내가 살았던 배경은 나의 그림자가 됨으로 나를 존재케 한다. 어둠속에서 새벽별이 빛나듯이 나의 어두운 과거가 주님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의 본질이 더욱 가치있게 와 닿는다. 이것이 성령이 내게 허락한 선물이요, 은혜다.
폭식하듯, 성경을 한꺼번에 알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걸식하듯, 진리를 단번에 깨닫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 주님은 ‘속도와 방향’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요즘은 성경을 하루에 1장씩 읽는다. 속도를 늦추니 광풍이 사라진다. 내가 있는 곳이 사막인줄 알았으나, 주님과 함께 있는 우주여행의 지구열차다. 광풍이 아름다운 광경으로 바뀔 수 있음을, 믿어본다. 영화 듀란(핸즈 오브 스톤, 돌주먹, 2015)에서 대사관안에 있는 미국인이 밖에 있는 듀란에게 총을 겨누며 협박하자, 듀란이 겁을 먹는다.
그때, 스승이 넌지시 알려준다.
“겁먹지마!! 생각하기에 달렸어!! 그들이 갇혔어. 알겠지!!”
듀란은 동의하지 않는다.
“총을 가진 미국인한테 우리가 갇혔어요. 그들이 우리를 가뒀다구요!!”
그러자, 스승은 다시 말한다.
“생각하기에 달렸어. 저들이 갇혔어!! 너는 자유롭고, 총을 든 저들이 갇혔어. 생각하기에 달렸어!!”
듀란은 스승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정신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한다. 그때부터 듀란은 정신적 권투로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있다. 원효대사가 “해골 바가지의 물”에서 깊은 도(道)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백성과 함께한 구도자의 길을 선택하듯이, 유학을 떠난 의상대사도 귀족을 위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듯이, 모두 각자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나는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33년을 했다. 올해로 34년째다. 순복음교회 3년, 기독교복음선교회 30년이다. 33년동안 복음서를 깊게 읽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알려주는 기본 교과서인데, 국어 영어 수학 과학처럼 필수과목 4과목으로 4복음서인데도, 나는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2월 1일부터 날짜별로 1장씩 읽기로 다짐했다. 오늘은 2월 4일, 마태복음 4장이다. 3월에는 마가복음을, 4월에는 누가복음을, 5월에는 요한복음을, 6월에는 사도행전을, 7월에는 다시 마태복음을 읽어야겠다.
하루에 1장을 읽으니까, 복잡하지 않고, 깊어진다. 과녁판을 가만히 쳐다보듯이 응시(凝視)하게 된다. 언젠가 목사님이 내게 “소제목으로 성경을 읽는 것도 좋다”라고 권면해주신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태복음 4장은 ‘사’(四)로 발음되니까, ‘사막의 광야 시험’으로 제목을 정했다. 마태복음 3장은 ‘삼’(3=셋)이니까 세례요한의 물세례로 제목을 정했다. 성경을 드라마처럼 연상하면서 보니까, 드라마가 재미없어지거나, 드라마를 보면서도 성경이 보이는 긍정적 부작용이 발생한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깊이를 내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