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했다. 그래서 T종교와 J종교는 “예수님이 구원사역에 실패했거나, 낙원급 구원에 성공했다”라고 설명한다.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 실패한 사업가, 재수하는 우등생, 가난한 경제 전문가…..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의 정체성은 난해하다. 유대인은 실제로 예수님을 그렇게 조롱했다.
[마태복음 27장]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태 27:39)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태 27:4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중략)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마태 27:4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려졌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요, 팩트다. 제자들은 이것을 납득하기 가장 어려웠다. 십자가에 메달리는 순교의 길에 순종할 때까지 제자들은 ‘의문의 십자가’를 담당했다. 성령으로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의 깊은 비밀을 납득하고, 깨달을 때, 베드로도 바울도 도마도 십자가의 길에 순복했다. 바울이 말하길,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장애물이고, 헬라인에게 어리석은 것이다”고 했다. 그렇다. 십자가에 못박힌 구원주는 인류문명에 영원한 ‘물음표’다. 누가 그것을 답하랴!! ‘구원받지 못한 그 길이 구원의 길이다’는 이 역설적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리요!! 믿는 자에게 구원의 마침표요, 믿지 않는 자에게 의문의 물음표가 된 것이 십자가의 비밀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에린 브로코비치’다. 내가 청년의 때에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속 여자 주인공과 같은 한 여인을 만나서, 내 신앙이 새롭게 변화해서,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되었다. 내 인생의 영화는 2개인데, 하나는 쇼생크 탈출, 다른 하나는 에린 브로코비치(쥴리아 로버츠 주연)다. 하나 더 꼽으라면, 쥴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펠리칸 브리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주님은 에린 브로코비치처럼 그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변호사는 아니지만, 피해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피해자들의 집으로, 삶으로, 그늘진 구석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자리에 앉았다. 소를 키우는 피해자에게 동의서를 받기 위해서 소똥냄새를 맡으면서, 옷에 냄새를 묻히면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반면, 화려한 옷과 명성을 가진 여자 변호사는 냄새와 악취 때문에 피해자에게 가지 못하고, 피해자에게 오라고 했으나, 동의서가 나오지 않았다. 극명한 대립구조다. 예수님은 창녀에게 돌을 던지려는 ‘의로운 분노’앞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 그리고 창녀에게 자유와 구원을 선물했다. 그 댓가로 주님은 ‘창녀와 관계한 사람’의 유언비어가 퍼졌다. 주님은 그러한 오해를 받으면서 구원사역을 펼쳤다.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자, 바로 붙은 오명은 “바알새불”이다. 귀신을 쫓으면서 주님은 ‘귀신의 왕’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귀신들린 그들의 자리에 주님이 앉으신 것이다. 주님은 가버나움에 앉아서, 건너편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의 ‘군대귀신’을 물리친 것이 아니다. 미친 광풍속으로 작은 배를 타고 가셔서, 공동묘지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그 사람을 구원하시고, 주님은 골고다 공동묘지의 십자가에 메달리셨다. 주님의 구원방식은 사람의 방식과 차원이 다르다. 세상은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를 말하지만, 주님은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를 행하신다. 구원의 밧줄이 물속에 빠지지 않고 어찌 생명을 구출하랴!! 요나가 바다에 빠지지 않고서, 어찌 침몰하는 배를 구원하랴!! 어둠에 빠질 니느웨를 구출하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한다. 구원받지 못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은 구원받지 못한 곳으로 걸어가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부활하셨다. 십자가는 구원받지 못한 증표요, 부활의 주님은 구원의 증표다. 십자가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이요, 부활의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의) 구원주를 의미한다.
마태는 족보장에서 바벨론을 기점으로 14대를 끊었다. 아브라함~다윗, 다윗~바벨론, 바벨론~예수까지 각각 14대라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방박사가 등장한다. 이것은 영적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로마족속을 원수로 지목했으나, 주님은 영적 바벨론을 지목한 것이다. 바벨론 출신의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한 사건 곧 다니엘서에 예언된 영적 해방을 말하며, 다니엘은 ‘죄악 때문에’ 포로생활을 했다고 적었다. 보여지는 식민지보다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쇠사슬이다. ‘마귀의 노예생활’에서 주님은 백성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해방의 본질을 알지 못하니, 다니엘의 예언서를 물었던 것이다. 민족의 해방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해방이다. 영혼의 해방은 주님이 태어나면서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의 독립기념일’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