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향유옥합은 구원사역에서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모두 향유옥합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창녀의 향유옥합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요한복음은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육체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옥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육적 부활’을 주목해야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는 말씀을 잘 듣는 성도, 마르다는 밥을 준비하는 성도로 묘사된다. 나사로는 마리아의 오빠요, 마르다의 남동생이다. 마르다-나사로-마리아의 가족관계였다. 어느날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고 말았다. 예수님께 SOS를 보냈으나, 장례식을 치르고서 도착하셨다. 마리아는 상실감에 빠졌다. 예수님이 오셨지만, 문밖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나사로의 장례식에서 마르다가 예수님의 사명을 고백한 것으로 요한은 말한다. “주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때에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다”라고 모호한 말씀을 하셨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예수님의 심령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로 확고히 결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에게 오빠 나사로의 죽음은 너무나 큰 비통함이었다. 게다가 예수님이 늦게 오심으로 오빠가 죽었다는 인간적 마음까지 겹쳤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불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간구로 롯을 구출하듯, 예수님은 마리아의 눈물로 나사로를 살렸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으로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1:13)
오빠를 살려준 예수님께, 마리아는 예수님을 진정한 오빠로 받아드리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베다니 지역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할 때, 마리아는 결혼지참금으로 모은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드렸던 것이다. 사랑의 사연이 담긴 향유옥합이었다. 예수님께는 나사로를 대신하는 죽음의 장례식이었다. 요한도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후 예수님의 살해음모가 시작됐다고 적고 있다.
나사로가 육체로 죽었듯이, 예수님도 육체로 죽었다. 나사로가 육체로 살아났듯이 예수님도 육체로 살아났다. 요한복음의 보도뉴스는 이것이다.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구원사역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구약의 아담속에 갇혀 죽은 자들을 살리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선택해야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가?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에서 마리아의 신앙고백처럼 거듭나야한다. 마리아는 죽은 오빠 나사로가 살아나면서 진정한 오빠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 진정한 맏형은 누구인가? 진정한 선생은 누구인가? 진정한 어머니는 누구인가? 진정한 아내는 누구인가? 진정한 남편은 누구인가? 진정한 대통령은 누구인가?
나는 예수님과 인간적 친분은 없다. 그분은 2천년전 유대인 청년이고, 나는 현대인이므로 알고 지낼 형편이 되지 못한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인간적 면모를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사랑하는 마리아에게 그 오빠를 살려주신 주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생각이 깊어졌다.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에서 알리타가 남자친구에게 그 사랑을 증명한다면서 ‘인공심장’을 꺼내서 보여주듯이, 구원받지 못한 길을 가심으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소명은 그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오빠의 친구’였으나, 죽은 오빠의 살아남을 통해서 ‘진정한 오빠’로서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 인격을 사랑하므로 ‘인생의 남편으로서’ 고백하게 된다. 지참금인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드린 신앙고백은 2천년이 지나도록 그 향기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아담안에 죽은 인류를 살리시려고 아담처럼 죽으셨다가 예수님은 그 육체가 영체로 살아나셨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마다 예수님을 진정한 아담, 후아담으로 고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