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1절은 내게 상당히 부담되는 성경구절이다. 내 직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도대체 어떻게 이 말씀을 준수할 수 있을까? 대략난감이다. 조선일보와 한겨례 신문을 읽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비판의 늪에 빠져있다. 동의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에 위치하면서 비판의 돌이 들고 있다. 우리가 들지 않아도, 그 편에 동의하면서 그들의 손에 들린 비판의 칼날에 동참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말씀은 지키기 난해하다. 이렇게 의견을 내는 것도 실상 작은 비판이다.
그런데, 7장 1절 말씀은 인생에게 주는 축복의 말씀이다. 비판을 받았다면, 그것은 비판의 결과다. 그렇게 인식하면 된다. 비판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야한다. 나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제 ‘자성과 성찰’의 시기를 보낸다. 고독의 독방에서 ‘까마귀처럼 행했던’ 지난 날들을 참회한다. 옛날엔 저주와 심판을 엘리야처럼 기도했다면, 지금은 주님의 방식으로 평화의 비둘기로 축복의 기도를 간구한다. 심판을 간구하면, 결국 심판을 받는다. 저주의 기도를 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에스더서 하만이 그 행한대로 받았듯이.
고백하면, 나는 몇몇을 전도했다. 전도한 생명이 교회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생명이 내게 “기독교로 가겠다”고 통보했다. 나는 무참했다. 너무나 슬펐다. 눈물을 뿌리면서 그 생명이 섭리사에 살아남길 기도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주님께 심판과 저주를 간구했다. 그런데, 그 생명은 니느웨성처럼 더 잘되었다. 나는 요나의 딜레마에 빠졌다. 그리고, 어느날 주님이 내게 나타났다.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나는 섭리사를 떠남으로 추방당했다. 내가 간구한 심판과 저주가 내게 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낮은 자세로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이 틀렸는지, 내 자신부터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모르면, 무지의 담대다. 알면, 낮아져 배운다.
마태복음 7장은 축복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3장 빌라도 학살사건과 실로암 망대 붕괴사고와 연결해서 상고하면 의미가 드러난다. 빌라도는 ‘로마를 대적한 유대 반란군’을 학살했다. 로마는 일본과 같고, 식민지에 있던 이스라엘 독립군이 전멸한 사건이다. 민족혁명의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빌라도 학살 뉴스를 전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다. 그것이 정답이다. 탄핵받은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고, 침몰한 세월호를 거론할 때, 주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받은 처벌이 심판인지, 십자가인지,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고, 각 개인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적용된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처럼 자신에게 있는 들보를 빼야한다.
대부분 생각한다. “나처럼 사는 사람이 무슨 들보?”라고. 들보가 아닐 수 있다. 그저 양심에 거리끼는 티에 불과할 수 있다. 그것조차 들보처럼 생각하고 없애야한다. 자신의 양심에 있는 불편한 것들은 모두 ‘들보’에 해당된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성전, 양심성전, 생활성전, 생명성전을 청결히 하면서 살아야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道)로서 형제의 허물을 위해, 교회의 잘못을 위해,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회로 엎드려야한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내려진 숙명이다. 누군가의 잘못이 보이면, 그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잘못을 회개하라는 계시의 말씀이며, 형제의 잘못을 대신 회개하라는 주님의 권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