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에 좁은문이 나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문은 길이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문은 크고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이 성경구절은 대부분 이단들이 초기에 자주 활용하고, 소수 신앙공동체들이 즐겨 사용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는 성경구절과 함께, 짝궁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사용하면서, 좁은문=예수님, 넓은문=율법으로 규정했을까? 좁은문=기독교, 넓은문=유대교로 규정했을까? 전혀 아니다. 예수님에게 정경은 ‘구약’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이 말씀을 하시는 때에 마태복음은 존재조차 없었다. 좁은문과 넓은문은 반석집과 모래성으로 비유된다. 마태복음 7장 13~27절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좁은문=반석집=참된선지자=말씀을 행하는 자=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천국 입국
넓은문=모래성=거짓선지자=불법을 행하는 자=주여 주여 하는 자=천국 거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되어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정확한 자격요건이다. 천국 영주권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는 자(마태5:20)이며, 소금과 빛으로 사는 자들이다.
유대교에 속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천국의 문인 예수님께 오지도 않았다. 천국문에 들어가려고 모인 성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는 자”가 천국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결국, 유대교가 넓은문, 예수님은 좁은문의 설정은 아닌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 온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를 보더라도, 여기서 ‘나’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자마다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할지라도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라”고 하신다. ‘떠나라’는 곧 사탄에게 사용하는 단어이다. 마태복음 16장 22절을 보면, ‘좁은문’이 무슨 의미인지 상세히 나온다.
[마태복음 7장]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16장]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베드로가 “주여! 주여!”라면서, 십자가 길을 반대한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뜻길이었다. 십자가를 반대하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기울어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길’이다. 십자가는 ‘헌신과 희생’의 상징물로서, ‘소금의 길’이다. “빛의 사람이 되라”는 말과 “십자가를 짊어져라”는 말은 모두 동일하다. 사람들은 “십자가”에는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빛”에는 좋은반응을 보인다. 둘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뜻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3번째 시험문제를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길 vs 천하만국의 영광이 대비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길이 좁은 길이고, 천하만국의 영광을 누리는 길이 곧 넓은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길’이다. 생명을 내놓는 육체적 죽음의 십자가도 있고, 심령적 죽음의 십자가도 있고, 권세적 죽음의 십자가도 있고, 경제적 죽음의 십자가도 있고, 명예적 죽음의 십자가도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모두 다르다.
[마태복음 16장]
15.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반석위에’를 보통 ‘베드로위에’로 해석한다. 틀렸다. 결코 ‘반석=베드로’가 아니다. 천국열쇠 때문에 그렇게 보여질 뿐이다. 베드로와 반석은 비교될 수가 없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님”이다. 왜냐면, 이 맥락에서는 예수님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뜻길을 반대하고, 도망쳤는데, ‘모래위에 지은 교회’가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반석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므로, 예수님만이 반석이 되는 것이다. 이후 회심한 베드로도 반석이 된다.
기독교나, 천주교나, 이슬람이나, 모든 이단들이나, 자신의 교주를 “주여!! 주여!!”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곧 ‘십자가의 길’이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진리다. 십자가의 길이 ‘빛과 소금의 길’이며,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행하는 자’이며, ‘율법의 본질을 행하는 자’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문은 ‘율법을 형식으로 행하는 자’이며,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자를 말한다.
가인도 아벨도 모두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이다. 아벨은 선을 행하고, 가인을 악을 행했다. 같은 자녀의 신분이면서, 다른 행위로 살았다. 아담과 하와와 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형시켜서 이해하고, 하와가 말씀을 어기도록 유혹했다. 말씀을 듣는 자,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그처럼, 사명을 받는 자,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 거짓 선지자는 선지자의 사명을 사울처럼 받았으나, 변질됨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사명과 말씀을 받고서 변질되는 것은 ‘넓은 문’이다. 반면 사명과 말씀을 받고서 그것을 행하고 지키는 것이 ‘좁은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