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목사님이 예배를 강해설교로 전하시며, 악보의 이면지에 깨알처럼 적은 내용을 펼치면서, “성경과 논문과 출처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전한다”고 했다. 20p가 넘는 이면지에서 쏟아진 그때 설교는 나를 사도 요한과 대면케 했다. 그 시대앞에 요한이 부활의 예수를 “살과 뼈”를 가진 인격의 옷으로 증거했다면, 그때 목사님은 사도 요한의 입장과 심정을 “살과 뼈”를 가진 인격으로 성도들에게 소개했다. 나는 깜짝 놀랬다. 성경의 옷이 벗겨지면서, 비유가 사라지면서, 보던 것이 보이지 않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성경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꼭, 알리타 마지막 장면을 보듯, 설교는 다음편을 예고한다. 알리타는 2부를 예고하고 끝났다.
요한은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하라고 했다. 예배와 경배와 섬김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진리와 성령이다. 진리의 성령이 더 구체적인 의미이며,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이다. 태초의 말씀이 곧 예수님이고,그 예수님이 진리이다. 한반도에 정도령이 온다고 하거나, 진인이 온다는 전설이 있는데, 마치 유대교에 엘리야가 온다거나 하나님이 온다는 예언과 흡사하다. 누가 오긴 오는데, 오직 진리의 성령이 와야만, 진리의 주인인 예수님을 증거한다. 많은 교회 목사들이 있지만, 내가 지금의 교회를 선택한 이유는 진리를 중심하려는 목회자의 순수한 목회철학이 마음에 와 닿아서다. 진리의 성령에 대해 성경적으로, 기독교회사적으로, 그렇게 명확히 “엑세게사토”하듯 토해낸 그때 그설교, 내 인식의 살과 뼈가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증언된 진리의 성령은 곧 “예수의 성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