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이어폰이 있다. 까페마다 음악이 달라서다. 이어폰이 없으면, 내가 결정하지 못한 소리에 고막이 노출된다. 요임금때 허유는 왕이 되라는 소리를 듣고, 귀를 씻은 것으로 유명하다. 권력이 얼마나 사람을 더럽히는지 암시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기산지절(箕山之節)이 유래했다. 허유가 기산으로 숨었기 때문이다.
KBS를 틀면, KBS 드라마를 하고, MBC를 틀면, MBC가 나온다. 채널따라 각각 나오는 소리가 달라진다. ‘황후의 품격’이 마지막회가 남았다. 그 채널속에서 나는 분노했고, 암울했고, 심난했고, 권력의 피라미드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위안을 오써니와 나왕식으로 얻었다. 나는 또 다른 ‘황후의 품격’을 기다릴 것이다.
그 드라마에서 내 심장을 찌른 문장이 있었으니, “황제는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아니다”는 대사다. 그 대사는 황제 이혁(신성록)이 가장 먼저 했고, 이후 나왕식(최진혁)이 이혁을 비판하면서 다시 인용하고, 오써니(장나라)도 마지막회에서 인용했다.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아닌 사람이 곧 ‘황제’이며, 황제의 권력을 가진 자이다.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러하다.
내 인생에서 내 삶에서 홀로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비관적 선언일 수도 있겠으나, 처참한 고단함을 직면한 자에겐 세상과 방어벽을 쌓고, ‘나만의 궁궐에서 나의 안전한 집’을 꿈꾼다. 내가 내게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아니다. 지난 성탄절까지 나는 이런 생각으로 살았다.
단상에서 목사님이 헤롯왕을 거론하면서, “헤롯이 왕인데,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여러분 인생가운데, 여러분 왕국에서, 여러분이 주인인 인생에서,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여러분 안에 있는 작은 헤롯을 죽이세요”라고 말했다. 아!! 그때 그 충격!! 내 안의 헤롯이 들통남으로 도망쳤다. 도망친 작은 헤롯들이 슬금슬금 쥐새끼처럼 내 마음을 엿본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속삭이며….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죄가 아닐까?
황제가 황제의 것으로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아닐까?
죄(罪)는 무엇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미투운동의 설전(舌戰)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시키고, 남편의 아내가 페북에 입장을 토로함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욱 혼탁해진다. 세상을 쳐다보면, 온통 죄투성이다. 마치, 현실의 ‘황후의 품격’을 보는 듯 하다.
내겐 성찰의 이어폰이 있다. 매일 성경 1장을 깊게 읽는다. 이어폰을 꼽듯, 내 마음을 연결하고, 내 양심이 씻겨지길 바라면서 성경 말씀으로 나를 닦아본다. 오늘은 2월 15일 마태복음 15장을 읽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고발한 사건이 나온다. ‘손을 씻지 않은 것’으로 제자들은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자들”로 그들을 규정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태복음 15:11)
‘손을 씻지 않은 것’이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각종 세균은 있을지라도, 마음을 오염시키지는 못한다. 반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느냐”고 판단한 그들의 비판이 제자들의 마음을 더럽힌다. 비판받으면 그래서 ‘죄의식’이 생긴다. 제자들의 마음에서 생긴 ‘죄의식’의 출처는 ‘장로들의 전통’에서 기인한다. 예수님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을 예로 들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나는 제자 그룹에 속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을 오늘도 씻기 위해 말씀묵상의 빗질과 기도의 세족식을 한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비유를 풀어준 대상은 베드로와 제자들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내면청소를 하라는 강력한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거친 비난의 마포를 가지고, 제자들의 더러운 내면을 청소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