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월 16일 마태복음 16장을 읽는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읽어갈 미지의 성경이 내게 있음이다. 맹골수협보다 무서운 ‘상실의 골고다’에 빠져 ‘두려움과 공포에 덮힌’ 내 인생에 위로와 평안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다.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Eloi, Eloi, lama sabachthani)’는 십자가의 현실을 시편22편으로 승화시킨 예수의 절규가 섞인 문학적 고뇌였다. 내 인생도 시편22편 초반부에 위치하므로, 현실은 광풍이 거세다.
마태복음 16장 5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했다. 예수님이 얼마나 심각하게 말했으면, 서로 상의하면서 “두고온 떡”을 걱정한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니, 제자들의 애닯음은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리라.
이 사건은 신앙의 근본을 보여준다. 결단코, 말씀은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다. 성도의 머릿속에 있는 것으로 변환되어서 들릴 뿐이다. 예수님이 물을 포두주로 바꾸시는 기적을 보이셨다. 놀랍게도, 사람은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변환시키는 표적이 일어난다. 이것이 말씀의 아이러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고, 제정신을 차렸구나고 처음엔 생각했을 것이다. 알고보니, 바리새인보다 더 황당하게 ‘먹을 떡’을 걱정하고 있었으니, 이런 귀머거리 제자가 없었던 것이다. 7천명을 먹였던 ‘생명의 떡’ 비유 사건을 거론하면서 강하게 꾸짖자, 그제야 제자들을 붙잡던 무지의 귀신이 물러갔다. 성도의 고정관념은 ‘족쇄’와 같다.
“신랑과 신부가 살림을 차렸다”는 표현은 지극히 정상이다. 모든 성도는 남편인 예수를 신랑으로 모시고, 신부처럼 살림을 차려야 한다. 이 말이 어떤 단체에 유령처럼 떠돌았다. ‘예수’는 빠지고, 각각 핵심 인물로 대체되어서 핵심 지도부를 중심으로 퍼졌다. 나는 듣지 못했는데,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소문의 당사자로 지목된 그가 말해줘서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됐다. 엄청나게 호통을 치고, 저주와 악담이 쏟아졌다. 끔찍했다.
그때,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뭐가 문제지?”
사건은 하나요, 그것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이다. 그 사건을 겪고서, 내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신이 판단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내적 신앙상태다. 제자들은 머릿속에 ‘먹을 떡’만 있으니, 예수님이 ‘누룩’이라고 하니까, 순식간에 ‘떡’이 생각난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에 반응해서 깨달음이 일어난다.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가?
뇌(腦)는 月巛囟의 합성이다. 月은 몸통, 巛은 머리털, 囟은 뇌를 말한다. 囟은 꼭 잉크통을 닮았다. 머리는 지식을 담는 통이다. 그 속에 무엇이 담겼느냐로 세상이 보이고, 들리고, 판단한다. 성경의 말씀도 동일하다. 머릿속에 세상이 가득차면, 말씀을 읽어도 세상 것으로 이해된다. 어쩔 수가 없다. 제자들의 머릿속에 ‘인본적 누룩’이 있으니, 예수님이 말씀을 전해도 ‘경제적 이권’으로 들리고, ‘권력의 쟁취’로 들린 것이다.
말씀은 마귀도 듣는다. 창세기 3장에서 뱀도 말씀을 알았고,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도 예수님의 사명을 알았다. 마귀에게 말씀을 뺏기지 않으려면, 혹은 마귀의 족속이 되지 않으려면, 말씀을 진정 깊게 깨닫고, 하나님을 근본으로 섬겨야한다. 말씀을 모르는 것도 문제요, 말씀을 변질해서 아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혹시 내가 그러할까, 성령께 간절히 기도하며, 믿는 성도들은 교회 목사와 성직자가 그렇지 않게 해달라고 눈물로 간구해야한다. 이것이 교만 퇴치법이다.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빼라”는 것은 “속옷에 숨어든 쥐새끼”를 잡으라는 것과 같다. 범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T종교와 J종교와 S종교는 ‘선악과 비유’ 말씀을 살짝 변경했다. 비유를 해석하면서 ‘때가 되면 따먹어도 된다’는 것으로 바꿨다. 이 작은 변화가 대재앙을 초래했다. 창세기에는 선악과를 놓고 심각하게 다투는 경쟁세력이 있다. 하나님과 뱀이다. 하나님은 ‘결단코 따먹지 말라’였고, 뱀은 ‘따먹어도 된다’는 부류였다. T종교와 J종교와 S종교는 선악과를 ‘이성관계’로 해석하면서, 결국 ‘따먹어도 된다’는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들은 뱀의 편이다. T종교와 J종교와 S종교에는 ‘때가 되면 선악과를 취하는’ 결혼하는 부류가 있고, ‘먹어도 죄가 안되는’ 부류가 있다. 그들의 교리가 이것이며, 대재앙이다.
왜 선악과를 ‘이성관계’로 풀었을까? 그것은 머릿속에 그것이 가득차서 그러하다. 말씀을 변질시켜 이해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다. 선악과는 ‘결코 따먹지 말라’이다. 그것이 이성관계의 비유라면, 그래서 평생 여자를 멀리하는 극기훈련을 하면서 인생을 살라는 것인가? 놀랍게도, 허락된 자들은 따먹을 수 있다는 법률이 나오므로, 선악과 사건은 대재앙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속에 내재한 ‘악한 지식’을 없애고, 성경번역에서 ‘선악나무’를 ‘선악지식의 나무’로 교정하길 기도한다. 더불어, ‘선악과’도 ‘선악지식의 열매’로 고쳐지길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