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떡의 누룩이 아니요!!
미세먼지가 보이거나, 미생물이 보이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가시광선은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요, 소리는 가청주파수로 들을 수 있다. 냄새도 맡을 수 있는 한계에서 맡고, 맛도 미뢰(味蕾)로 느낀다. 밥맛이 없는 것은 밥이 맛없거나, 미뢰가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성경은 지식의 옷을 입고 있다. 읽으면 도덕책같다. 그래서 성령의 소리를 듣는 ‘영적인 고막’을 가져야한다. 성령의 소리는 성령으로 듣는다. 진리의 성령을 받는 것은 성령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나는 지난 30년간 눈뜬 봉사였고, 귀있는 귀머거리였다. 성경을 이뤘거나, 성경의 주인공을 만났으므로, 성경책은 ‘책보다 작가’라는 논리로서 버림받았다. 성경이 버려지면서, 십자가도 사라졌다. 교회의 십자가는 공동묘지로 보였다. 인식의 무서움이 이와 같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마태의 편집이 얼마나 탁월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태는 기록했지만, 마태를 붓삼은 근본자는 성령이시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탐구할수록 하나님을 경배한다. 구약과 신약의 서로 다른 저자들이 쓴 성경이 하나로 연결되어서 그렇다. 사람을 붓삼은 진리의 성령이 행하신 일이다.
마태복음 16장은 ▲요나의 표적 ▲누룩 비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자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 ▲십자가 사건 선포 ▲베드로의 반대가 나온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핵심적으로 묘사한 곳이 바로 ‘마태복음 16장’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말하니, 제자들은 “먹을 떡”을 걱정했다. 경제적 메시야를 기다리는 인생의 현실문제다.
예수님의 사명을 깨달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권력형 그리스도’였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선포하자, 베드로가 곧바로 반대했다. 반대한 이유는 베드로가 ‘정치적 그리스도’를 생각해서 그렇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사건과 연결된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베드로였다.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요한복음에는 ‘오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의 행동’이 나온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성경을 볼 때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서로 비교하면, 내적 진실이 수면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마치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같이 보면, 사건의 진실이 조립되는 것과 흡사하다. 공관복음은 ‘육적 보수’, 요한복음은 ‘영적 진보’와 같다.
[요한복음 6장 – 오병이어 사건]
14.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것’은 5천명 백성이 단체를 구성해서 예수님을 ‘회장’과 같은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비일비재하는 사건들이다. 권력형 그리스도를 꿈꾸는 자들의 술수요,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제시한 ‘부귀영화의 권력’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다. 그처럼, 오병이어 사건이후 예수님은 빈들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자, 주님은 “죽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께 경배함을 말했다. 여기서 ‘죽음’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죽음’이다. 정치와 권력과 명예와 관련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교적 그리스도이다. 요즘의 종교는 종교권력도 있으니, ‘종교적 그리스도’도 뜻이 변색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그리스도’이다.
내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인가?
주님은 묻는다.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주님은 다시 묻는다. 우리에게,
“그렇다면, 너희에게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