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를 심도있게 다뤘다. 베드로 공동체는 ‘재산몰수 공동분배’ 제도로 운영됐다. 부자청년 이야기는 교회 정체성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기엔 다소 무리가 많다.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부자청년의 반응은 심각했고, 예수님도 심각했고, 제자들도 심각했다. 결국, ‘바늘귀에 들어가려는 낙타’만 남겨졌다.
–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누가복음)
잃어버린 고래 한 마리가 직접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이날 고래사냥은 실패한 것이다. ‘재물의 많음’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3가지다. 부자청년이 어떤 부분에서 크게 근심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① 소유를 팔아라
②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라
③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은 ‘소유를 팔라’고 했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소유를 다 팔라’고 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모든 소유를 처분하라는 그 말씀이 상당히 부담될 수도 있다. 비트코인을 처분하는 것처럼, 주식을 처분하는 것처럼, 직장을 그만두는 것처럼,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처럼, 에스더에게 ‘황후의 직책’을 버리고 간언하라고 한 것처럼, 상당히 부담되는 말씀임에 틀림없다.
②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라는 말씀은 모든 공관복음에서 ‘나눠주라’는 말만 있지, ‘모든 것을 나눠주라’고 하지는 않앗다. 소유를 처분하는 것은 맞지만, 나눠주는 것은 부자청년의 재량에 맡긴 것이다. 베품의 삶을 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소유를 처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소유가 있으면 소유를 관리하느라 거기에 신경이 쓰인다. 니고데모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다. 국회의원 직분을 버리지 못해서 그렇다. 일곱귀신이 사라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시고 섬겼다. 즉,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세상적 일곱귀신’처럼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내가 지금 드라마를 보면, 성경책을 읽지 못하는 것과 같다.
③ 나를 따르라 : 어쩌면 부자청년이 이 부분에서 ‘근심’을 했을 수도 있다. 아리마대 요셉이 만약 그 부자청년이라면, 니고데모처럼 참회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뒤늦게 나타내면서, 회심의 부자청년이 된 것이다. 부자청년은 곧 ‘관성의 법칙’과 같다. 우리가 왜 중력을 떠나지 못하는가? 중력덕분에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갈대아 문명의 중력권을 벗어난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아브라함은 떠났고, 부자청년은 ‘재물의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근심이 근심과 슬픔으로 끝나면, 그것은 부자청년이다. 근심을 극복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도 부자청년처럼 모두 근심하고 낙담했다. 부자청년은 재물의 많음에 묶였다면, ‘재물의 없음’에도 묶이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주님께서 “가자”고 하면, 그냥 일어나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양치기 정신’이 있어야한다. 마치 이 까페에서 저 까페로 옮기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