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에게 편지를 보내서, 교황이 현직 대통령에게 “가브리엘 신부의 자살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편지 한통으로 사법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경찰서는 사건을 재조사하는 것처럼 보여질 뿐, 똑같은 반복의 연속이다. CCTV까지 조작해서, 중요한 영상은 삭제해서 진실을 은폐했다. 열혈사제 드라마는 ‘무한반복의 지옥’을 ‘지루한 일상의 연속’으로 말하고 있다.
동일한 반복, 세상은 똑같이 악하고, 악한 세상을 향해서 분노하는 미카엘 신부는 똑같이 술에 취해서 돌아오고, 세상과 신부는 똑같은 무한반복의 연속일 뿐이다. 미카엘 신부는 자신의 반복된 모습이 너무 지겨운 것이고, 세상은 반복되는 삶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고, 차이는 거기에 있다. 영화, ‘트루먼 쇼’가 있었다.
모든 것이 원하는대로 되어지는 트루먼의 일상은 거대한 섬을 둘러싼 하나의 세트장이었다. 무한반복의 조작이 계속 이어지는 것, 그것이 잘되든, 못되든, 새롭게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지옥의 늪’이다. 편의점 알바생과 대화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계속 “간장공장 공장장”의 발음이 안되면서, 똑같이 당하기만 한다. 어느날, 을이 갑이 되듯 저항한다면!!
조직세계는 절대충성이다. 그 표식은 3가지다. 1) 90도로 인사하기 2) 상하 위계질서 3) 배신은 죽음, 종교세계가 조직처럼 통치되면, 짐승의 권력이 지배하는 것이다. 종교가 세상권력이나 주먹세계와 다른 것은 ‘사랑’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으나, 등을 돌렸으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사도들을 선동해서 디베랴 호수로 낙향했으나, 예수님은 다시 나타남으로 대화로 설득했다. 교회는 이와 같아야한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떠난 차자가 돌아왔을 때, 장자는 조직원처럼 대하는 것이고, 아버지는 가족으로 보듬었다. 폴더폰처럼 90도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하는 것이나, 자신의 자발성은 실종된 채 절대충성의 명분으로 굴종의 무릎을 꿇고 “예예예”를 한다면, 그것은 주먹세계의 신앙이다.
가브리엘 신부의 죽음에 있어서, 그 명예를 세상적으로 짓밟은 두 사람이 있었다. 실제로 죽인 자들이나, 거짓 증언으로 명예를 훼손한 것이나 동일하다. 거짓 증언은 사회적 살인과 같다. 두 사람은 거짓 선지자처럼 가브리엘 신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데 동참했다. 댓가는 ‘돈’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를 비난하면서, 그러한 비난속에 교묘히 숨어서 우리는 의롭다고 착각한다.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이 의로워질 수는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처럼 자신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관성의 법칙은 중력에 묶인 물체와 같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의 우주선이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긴 세월이 걸렸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인생이 무한반복의 습관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대개혁의 부활’과 같다. 겨자씨처럼, 실천하는 믿음이 삶을 서서히 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