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기쁜 고역이다. 주일만 되면, 새소리가 내게 휴식을 권유하여도, 영혼의 안식은 말씀을 통해 나옴을 믿기때문에, 나는 주일에 출근하듯 교회를 향한다. 오늘도 하나님은 내게 은혜를 허락하셨다. “교회 오길 잘 했구나… 집에서 쉬면 헛되고 헛될뻔 했구나….” 감동이 왔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이고, 설교는 선지자의 외치는 소리를 들어봐야 “성령의 감동”이 온다.
나를 새롭게 옮겨주신 교회에는 선지자의 외침이 있다.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마음이 새롭게 변화한다. 전도서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실 때, “전도자가 말하길 다른 전도자가 있다고 하는데, 새로운 전도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목사님이 묻는데, 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전도서는 전도자의 글인데, 다른 작가가 있다는 말과 같으니…. “그리스도가 누구의 후손이냐”는 예수님의 질문과 비슷하다.
“다른 전도자는 곧 죽음입니다 전도자는 “죽음의 전도자”를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장례식에 갔는데, 그곳에서 ‘내 차례도 오겠구나’를 진실로 깨달았습니다” (설교노트)
“내 차례”라고 목사님이 말씀할 때, 그 차례가 내게도 도둑처럼 올 수 있음을 진정 깨달았다. 성도 모두 숙연해졌다. 죽음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인생은 태어나면서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초상집을 기피할 것도 없고, 결별을 슬퍼할 것도 없고, 결혼을 기뻐할 것도 없다. 시청률 40% 드라마도 마지막회가 곧 다가온다. 모래시계처럼!!!
이렇게 쾅쾅쾅 뇌리를 때리는 말씀을 들어야, 몽유병같은 정신의 우상이 깨진다. “죽음의 전도자”는 도깨비 드라마를 통해 승화되었다. 죽음은 기피할 대상이 아니다. 결국 맞이할 인생의 마지막 수능시험이다. 답은 모두 알고있다. 정답을 알면서도 제출하지 못할 뿐이다.
오랜만에 교회에 출석한 성도와 대화를 나눴다. 무슨 깨달음을 얻었을까? 무척 궁금했다. 사업때문에 교회에 자주 못 오는 성도인데, 부인의 권면으로 늘 말씀을 좋아하면서, 오늘은 함께 출석해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했다. 고단한 세상살이, 남자는 돈벌 책무때문에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신앙을 찾아야겠다고…. 성경의 진리를 쉽게 설명해주신 설교를 들으며…. 죽음앞에 겸허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올해는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고백하며… 그 성도가 간증했다. 그 간증이 내게 또 다른 설교였다.
오늘은 어떤 귀한 분이 나의 권면을 받아드렸다. 칼럼을 쓰기로 한 것이다. 칼럼을 썼다는 ‘행동의 언어’가 내겐 복음이었다. 나는 누군가 글을 쓰는 것이 아름답다. “글”은 곧 “자신”을 이 땅에 남겨 기록하는 것이다. 생각이 흐려지기전에 글을 남기면 훗날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집에 가면서 글을 남긴다.
성도들에게 “죽음의 전도자”로서 비수를 날린 설교자의 말씀이 진정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었다. 요나에게 발사한 폭풍이 하나님의 선물이듯, 니느웨에 갑자기 출현해 멸망을 예언한 요나가 하나님의 선물이듯,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설교말씀이 내겐 은혜였다. (멸치볶음과 계란말이 반찬에 식사도 맛있었다. 3부예배는 참석 못하고 일찍 나왔다.)